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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버텨 나가는 것

보름스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한국인 부부와 가끔 저녁에 술을 마신다. 언제나처럼 시작은 가볍게 크리스마스 마켓 오픈 기념으로 따뜻한 와인 한잔 하러 간 것이었는데, 공감대가 남다르다보니 심각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술자리로 바뀌어서 길어지게 되었다.


두 집 다 유학생과 그 배우자의 신분인데, 독일에 온 이유나 목적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같은 학교, 같은 동네에서 시작한 처지가 비슷한 몇 안되는 경우다 보니 특히 할 이야기가 많다. 가장 걱정인 거주비자 문제, 돈 문제, 학업 문제, 학업 후 진로 문제, 독일어 문제, 등 당면한 수 많은 문제를 똑같이 짊어지고 가야 할 전우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독일에 온 지 1년 하고도 3개월이 흘렀고, 이 부부는 우리보다 6개월 정도 늦게 독일에 왔다. 그래서 두 커플 다 이 곳의 물정을 잘 모르는 뿌연 상태인 점까지 같다. 게다가 유학생 중에서는 사실 찾기 힘든 비슷한 연령대여서 더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적극적이고, 부지런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고, 그러면서도 우리 부부가 한국에서 조금 대하기 어려워 했던 부류의 끈적한 친밀감 같은 것도 별로 요구하지 않는 산뜻한 사람들이어서 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늘 즐겁다.


그래도 요즈음엔 우울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날씨 탓이 가장 큰 것 같다. 작년에도 나는 11월 중순이 지나서 해가 급격히 빨리 지고,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부터 무척이나 무기력하고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올해는 그나마 조금 나은데,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서도 있겠지만 요즘 꼬박꼬박 챙겨먹는 비타민 D3와 유산균제 덕분인 것 같기도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추천하고 있다. 그리고 두 집 다 정신없는 첫 학기를 마치고, 슬슬 독일에서 요구하는 일과 학교생활의 병행을 해야 하는 시점에 돌입하다보니 압박감이 있는 상태다. 게다가 배우자 신분으로 왔어도 각자 커리어를 고려해 일을 구하고,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어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많이 없는 시기를 겪어나가고 있다.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도 해 본 완전한 성인이 독일에 와서 학업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영주권 등의 거주자격을 얻어 이 사회에서 비교적 오랜 시간 살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기회가 안되어 독일에 사는 한국인들을 많이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사실 직접 대화 해 본 경우는 이 부부 제외하곤 어학원에서 잠시 스친 두 사람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문제가 대게 비슷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돈이다. 말도 안되게 적은 돈으로 무려 석사를 할 수 있는 독일에서조차 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애초에 미국이나 호주 같은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주고 학위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대안책으로 생각하는 것이 유럽 유학이기는 하다. 따라서 학업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전문 인력으로서 비교적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른바 이민의 정공법으로 유학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나도 그 케이스에 속한다. 하지만 학업에 쓰는 돈은 덜 들지언정, 시간이 더 많이 든다. 또한 당연하게도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내 경우는 학업은 영어로 하고 있지만 사실 독일에서 계속 살 생각이라면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 다 큰 어른이 언어를 하나 새로 배우는데 걸리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이 길게 필요하다. 학교를 다니고, 언어를 배우는 동안에는 제대로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 수 없으니,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적어도 3년간은 버틸 수 있는 돈이 필요했다. 우리는 3년까진 안되고, 2년 정도는 아껴 살 수 있는 만큼 돈을 모아서 가져왔지만, 늘 그렇듯이 예상보다 지출이 훨씬 많아서 남은 돈이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싹 다 까먹어버리기 전에 스튜던트 잡이라도 구하려고 구직활동을 시작한게 최근이다.


사정이 이러니 자신감도 많이 떨어진 편이고, 여러모로 울적하다. 한가지 위안이자 씁쓸한 현실은, 이 모든 힘듦을 겪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라는 거다. 잡 지원한 곳에서 거절메일이 왔음을 친구들에게 알리며 은근슬쩍 위로를 바랄 때마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해주는 말이 자신들도 수도 없이 지원하고, 거절당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술을 좋아하고, 이야기가 깊어지다보니 늘 술을 꽤 많이 마시는 편인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리고 많은 한숨과 한탄이 오갔다.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실질적인 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저 버티는게 최선이라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한 것에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버티는 것. 독일 사회에서 흔쾌히 환영받을 만큼의 부와 스펙은 아니더라도 , 걱정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엔 부족한 자금, 어학능력, 스펙, 자신감 덕분에 우리는 이 혹독한 시간을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이 부족함이 원인이 되어 찾아오는 위기 때마다 더 열심히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너무 고단한 결론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가 선택한 방식의 삶이다. 독일행 편도 비행기표를 사던 시점의 우리는 분명 이성적인 사람들이었고, 이러한 어려움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을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믿고 버텨나가는 수 밖에 없나보다.


그래도 이렇게 한 잔 기울이며 모국어로 넋두리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좋다.

곧 한국에 방문할 것 같은데, 친구들과 언어의 장벽 없이 실컷 떠들 생각하니 너무 좋다.

한국에서 먹을 그립던 모든 음식들보다도 간만에 만날 사람들과의 시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