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쓴 일기 '발효과학'을 다시 읽어보았다. 여기저기 틀린 문법과 문맥이 보이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지 못 함을 절실히 느꼈다. 언어 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 불안하다. 유학생이나 외국 거주자들끼리 스스로를 칭할 때 농담삼아 자조하는 '0개국어 구사자'라는 표현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영어로 배우는 내용은 꽤나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데, 그렇다고 해도 내 영어실력은 모국어 실력에 비해 한참 못미친다. 결과적으로 언어적 한계로 인해 배우는 내용이 한정되어 있고, 그만큼 사고도 제한된다고 생각한다. 영어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학기중에는 특히 영어능력 향상에 신경을 쓴다. 특별히 따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고, 학교 공부 때문에 읽어야 할 영어로 된 텍스트를 많이 읽고, 반복해서 나오는 정확히 뜻을 모르겠는 단어들을 사전에서 찾아보는 정도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넷플리스에서 시리즈를 보니까 나름대로 거기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표현을 얻는 것도 있다. 하지만 방학 동안 영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 쌓아놓은 것들이 휘발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와중에도 휘발되지 않고 침전해서 정말 내 것이 되는 어휘들이 있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쌓아가야 하겠지. 다른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도 기본적인 센스나 라틴어 뿌리의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어드밴티지 등이 있겠지만서도, 이런 시간을 나보다 훨씬 많이 투자하고 스스로를 단련 해 왔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한국어다. 한국에 살 때도 한국어를 엄청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맞춤법이나 문법을 심심치 않게 틀리고도 게의치 않았고, 띄어쓰기 같은 것은 정말 쥐약이다. 그래도 대학 교육까지 받았으니만큼 사회생활을 할 때나 공적인 상황을 위한 구술, 논술의 능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언어적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순수문학을 찾는 빈도는 나이가 들 수록 줄었었기 때문에 어휘능력이나 구사력은 나이를 먹었다고 더 발전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창 책 많이 보고, 음악 많이 듣고, 또 교과서나 문제집을 통해 문학작품을 많이 접했던 고등학생 때가 아마도 내 언어 구사력의 정점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는 아마도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어휘를 좀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후 십년 넘게 한국어 능력 향상을 게을리 했던 만큼 퇴보한 구석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모국어는 기초체력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 것을 튼튼히 해두지 않으면 아무리 기술을 배워봤자 구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사실은 독일어에 대한 부담도 있다. 여즉 비기너 단계를 못 벗어나고 있고, 컨버세이션 레벨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남편이 독일에서의 대학과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적어도 4-5년간은 이 곳에서 살아야 할텐데, 그러려면 독일어는 무조건 잘 해야 한다. 병원을 가거나 보험계약을 하는 등의 상황에서 더이상 언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독일어를 잘 해야만 좋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도 막대하게 넓어진다. 어차피 내가 언어를 하루아침에 배울 수는 없는 사람이란걸 알기에, 조급하진 않아도 내년 중에는 실생활에서 부담없이 언어를 구사하고 싶다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어릴 때부터 영어로 교육을 받고, 생활의 일부라도 영어만 쓰는 환경에서 살아온 친구들은 문장 자체가 유려하고 매끄럽지는 않아도 영어로 된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주 편하게 느껴지고, 영어를 쓰는 자신과 모국어를 쓰는 자신의 퍼스널리티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유머감각은 30%이하로 줄어든 느낌이고, 감정 표현은 절반 이하, 무엇보다 이미지화 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설명이 길어질 때 한번에 감을 잡기가 힘들다. 그래서 경제학이나 심리학에서 쓰이는 용어 및 개념은 늘 한국어로 먼저 찾아보고서 원문을 다시 읽어야 빠르게 감을 잡는다. 또 완전히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예시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복잡한 개념일수록 모국어가 아닌 이상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거나 또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떨 때는 영어로는 대충 감이 오는데, 상황에 맞는 한국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영어로 업데이트 된 지식에 맞춰서 한국어 패치도 하는 수고를 추가로 해야한다. 나같은 게으른 사람은 이런 노력을 미루고 미루다가 급기야 0개국어 구사자가 되고야 말 것만 같다.
이런 이유로 관심있는 주제나 최근에 고민하는 문제의 범위들을 차근 차근 글로 쓰는 연습을 게을리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영어로 써야 할 페이퍼가 너무나 많고, 그걸 위한 연습을 따로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기초체력이라도 잘 다져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한국어는 비교적 짧은 시간만 투자해도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