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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천국길을 지나면 도서관

날씨가 맑고, 덥다.


나는 경기도 성남시의 적당히 번화하고, 적당히 조용한 주택가에 살고 있다. 수도권 생활자의 쾌적한 주거를 목적으로 잘 계획된 도시가 20여년의 세월동안 잘 가꿔진 기분좋은 마을이다. 아파트가 참 많은데, 아파트 촌 사이의 넓직한 통로에 잔뜩 심어져 있는 나무와 풀이 오늘처럼 햇볕이 강하고 더운 날에 천국같은 그늘 공간을 만들어 준다. 어린 아이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깔깔대거나 킥보드를 타며 놀고, 어른들은 벤치에 앉아서 수다를 떤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도 나무그늘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는둥 마는둥 하며 아이들 노는 것을 구경한다. 넓고, 푸르고, 자동차가 다니지 않도록 해놓은 이 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지나가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우리 집에서 이 길을 지나가면 도달하게 되는 곳이 수영장과 도서관이다. 둘 다 좋아한다. 오늘은 도서관으로 갔다. 나는 지리를 기억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 소위 길치라서 4년을 넘게 산 동네지만 즐겨 찾는 곳이 얼마 안된다. 그래서 더더욱 자전거로 속도를 내도 안전한 길, 내려서 끌고 걸어가며 조심해야 하는 길, 자전거를 가장 손쉽게 주차했다 뺄 수 있는 쓰레기통 맞은편 주차공간, 어디에 무슨 종류의 책이 있는지 같은 것을 잘 알아서,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 갈 때면 특히 마음이 편하다. 아는 것은 (이럴 때는) 힘이다!


도서관에 가면 가지고 간 책을 반납하고, 여행기가 꽂혀있는 열로 간다. 곧 도쿄로 여행을 가기 때문에 ‘도쿄’가 들어간 책들을 쭉 눈으로 훑고, 마음에 드는건 뽑아서 목차나 작가소개를 읽어보고 하나 빼 든다. 여행기 칸에는 늘 여러 사람이 기웃기웃 거리기 때문에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미안하다. 그다음은 뒷 뒷 열로 찾아간다. 고개를 들면 건축에 대한 책들이 주루룩 꽂혀있다. 아래칸은 주로 전통 건축이고, 고개를 들어야만 보이는 윗쪽 칸에 현대건축에 대한 각종 에세이, 실용서가 꽂혀있다. 제목이 끌리는 것을 또 두권정도 빼 든다. 그다음은 왔던길을 되돌아 반대편 영역에 있는 문학코너로 간다. 헤밍웨이의 글쓰기 책을 읽고서, 헤밍웨이 소설을 다이제스트로만 읽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번 기회에 대표작을 한권 읽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관뒀다. 주루룩 꽂혀있는 같은 디자인의 문학전집에 기가 죽었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저 중에 대다수는 읽어봤어야만 할 것 같은데, 사실상 몇 권 읽은게 없다. 각기 다른 모양과 판형이었다면 저 위대한 문학들을 독파해야만 한다는 거부감이 덜할까? 모르겠다. 요즘의 관심사인 일본, 도쿄에 대한 문학작품이나 고르자는 생각이 든다. 마스다 마리의 에세이와 하루키의 단편소설집을 골랐다.


일요일 대낮에는 도서관에 사람이 많다. 빈 의자가 거의 안보인다. 문학 코너 구석으로 가니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었다. 앉아서 만만해 보이는 마스다 마리 책을 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나는 차마 쓰기 힘든 ‘말’에 대한 에세이였다. 몇몇 편은 내가 써 놓은 일기를 읽는 것처럼 평소 나의 생각과 꼭 맞았다. 특히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말이고, 아무도 관심 없으며,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누가 질문하거나 지껄이면 ‘나보고 어쩌라는걸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부분은 박수를 짝짝치며 동의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주변 어른이 해서 상처가 된 말을 되새기며, ‘나는 커서 절대로 저런 말을 하는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의 나와 약속했다는 부분도 마음 찡하게 와닿았다. 어린 나도 어른들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상처받고 방안에서 흑흑 울면서 독기어린 눈으로 나는 절대 저런 말을 하는 어른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무심코 어린 아이를 대하지 말아야지.


잠깐 읽다가 가려고 했는데, 자꾸자꾸 다음 장이 궁금해서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여행기 코너에서 뽑아온 일본의 작은 마을들에 대한 책도 관심 가는 곳만 예닐곱 챕터 골라 읽었다. 나머지는 목차정도만 읽고서 빌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느새 구석 의자가 꽉 찼다. 초등학생들이 조용조용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몇몇 목에 이름표를 건 학생들이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봉사활동을 도서관에서 하는 중인가 보다.


손을 씻고, 정수기에서 찬 물을 뽑아 마셨다. 공공장소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이런 서비스를 누릴 때 별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다. 일부러 빈 페트병을 들고가서 물을 받아 마시면서 오기도 한다. 그러면 어쩐지 큰 이득을 본 기분이다. 휴게실에 햇볕이 기분좋게 들어오고 있길래 들어가봤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조용한 식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나왔다. 휴게실 입구에는 자판기가 있었는데, 대부분 500-1000원 사이의 음료를 팔고 있었다. 저칼로리 칵테일캔도 있었다. 구석에 이상한 음료가 있어서 보니 ‘Random, ♡복불복♡’이라고 써있었다. 500원이었다. 아마도 판매중인 다른 음료 중 무작위로 하나가 나오겠거니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엉뚱한게 나오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돈을 한푼도 안들고 나와서 시도는 못해봤다. 다음엔 오백원 들고 도서관에 와야지.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심지어 더 좋다. 거의 내리막인 것이다. 물론 도서관을 갈 때는 오르막을 달려가야 해서 숨이 찬다. 내리막이지만 천국길에서 놀고있는 어린아이가 많아서 거의 브레이크 잡고 조심조심 달렸다. 바람도 기분좋고, 집에는 오전에 내려서 냉장고에 식혀둔 아이스커피가 있다. 그걸 마실 생각하니 속도를 내고 싶어졌다. 하야꾸! 집에 도착하니 고양이 두놈이 빈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 낮잠자고 있다. 커피를 당장 들이키고 싶지만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샤워를 먼저 했다. 뜨거운 김 풍기면서 나와서, 얄쌍한 유리컵을 꺼내서, 얼음을 몇알 집어넣고, 냉장고에 놔둔 아이스커피를 따랐다. 벌컥벌컥. 으악! 향기로워!!


이런 훌륭한 일요일을 일기로 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노트북을 켜서 일기를 쓰고 있다. 쓰는 중에 농구하러 갔던 남편이 돌아와서 씻는동안 유부초밥을 만들었다. 같이 만들기로 했는데, 어느새 배가 너무 고파져서 다 씼는걸 기다리지 못하고 만드는걸 시작했다. 유부초밥은 한번 만들면 냉장고에 남은걸 보관했다가 다음날 컵라면이랑 먹을 수 있어서 좋은데, 아이러니한 점은 내일 컵라면과 먹을 것이 너무나 기대되어 오늘 바로 만든 것은 어쩐지 들러리 같은 기분이다.


저녁식사도 마치고, 보채는 고양이들에게 캔도 까주고, 다시 앉아서 일기를 쓰고 있다. 좀 길게 쓰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쓰기 시작하고서 중간중간 방해받았기 때문에 다섯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새삼 느끼지만 글쓰기는 정말 어렵다. 목요일부터 대학원 지원에 쓸 Motivation letter 880단어 쓰는데에도 3일이 꼬박 걸렸다. 심지어 예전에 써 둔 초고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오래 걸렸다. 하지만 짧든 길든 글로 남겨져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내 생각들을 보고 있으면 무척 뿌듯하다. 별로 한 것도 없는 오늘이 의미있고 가치있게 기록된 것 같다. 일기를 더 자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