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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다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8월 한달동안은 딱히 듣고싶은 음악도 없었고 들어도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음악감상'을 당당히 취미란에 쓸 만큼 음악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고,
실제로 음악감상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듣기 싫을 때가 있다.
어차피 취미니까 그런 때가 와도 별로 신경은 안쓴다.
대게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에 거장의 훌륭한 작품을 감상할 마음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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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계기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음악이 좋게 들리기 시작했다.
어제 감상회에서 말러 5번 교향곡 듣는데 갑자기 두근두근 거렸다.
1악장은 사실 요 근래에 그랬듯이 집중도 잘 못하고 지나갔는데,
2악장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집중하게 되었다.
좋은 음악을 깊이 집중해서 듣다보면 풍경같은게 펼쳐지는데
마치 영화같은 재미난 풍경과 이야기가 시야를 벗어난 곳에서 펼쳐짐을 느꼈다.

어제는 동생 원근이가 친구 두명과 함께 와서 그림그리면서 같이 감상회에 참석했었는데,
세명이 다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청각장애인이 말러를 듣는 풍경을 보면서도 묘한 환타지가 떠오르기도 했고
아무튼 이래저래 영감이 많이 떠오르는 저녁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감상회 손님도 따로 없고, 다른 손님들이 가신 늦은 시간에
여느 때처럼 사장님, 미선언니, 면조오빠, 나 이렇게 넷이 남아있었다.
종종 이렇게 남게되면 수다를 떨거나 우리가 듣고싶은 음악을 막 찾아 듣거나 한다.
사장님껜 좀 죄송하지만 난 이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다.

열정, 비창, 템페스트로 이어지는 베토벤 소나타를 신나게 듣고,
오늘 면조오빠가 자전거 타면서 신나게 들었다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버젼으로 들었다.
필립스에서 나온 로얄필의 연주인데 막상 중요한 지휘자와 솔리스트 이름은 까먹었다. ㅠㅠ
고등학교 때 아빠가 사준 씨디에 들어있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즐겨듣는 너무나 좋아하는 곡이고
작년에 본 영화에서도 주제곡으로 쓰여 한동안 정말 많이 들었는데, 또 올해 들어서는 별로 듣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만큼 들은 몇 안되는 곡중 하나라 다른 연주자의 버젼으로 들을 때마다 정말 신나고 재미있다.
안네소피무터의 연주가 그동안 들었던 것중에 가장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장님이 오이스트라흐와 오늘 들려주신 것도 좋은 연주라고 하셨다.
오늘 들은 것은 전에 듣던 것들보다 훨씬 느리고, 신중하고, 악기소리마저 무겁고 어딘지 울적했지만
늘 듣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말투의 사람이 전혀 다른 톤과 분위기로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는 것처럼 긴장감이 돌았고,
1악장 끝부분은 너무나 그 사람의 연주소리와 잘어울리게 차분하고 신중하면서도 진실되게 흘러서 엄청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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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아 나는 정말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구나, 좀 더 열심히 음악을 들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취미란 것은 참 좋다.
이걸로 일인자가 될 필요도 없고,
돈을 벌 필요도 없으니까
내가 좋은 대로만 해도 좋은 유일한 행위 같다.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있는대로 좋고, 없으면 없는대로 개척하는 재미가 있고
잘하거나 못하거나 잘 알거나 잘 모르거나 억지로 꾸며내거나 무리할 필요가 없다.

간혹 취미로 즐기는 것에 너무 집착하여 우열을 가리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평가하려드는 피곤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나까지 피곤해지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