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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늦여름 한 주 방학

7월에 잠시 다녀왔던 런든

 

이번 주는 휴가를 썼다. 휴가를 쓰니 비로소 오랜만에 글이라도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이번 주에 네덜란드에 유자 픽업도 다녀오고 사업상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할 시간으로 쓰려고 휴가를 냈지만, 스케줄이 조금씩 밀렸고, 그동안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회사랑 사업일로 바빠서 집과 정원을 엉망으로 방치 중이기 때문에 그냥 집안일을 하면서 쉬기로 했다. 어딘가 2박 3일이라도 기분전환하러 다녀올까 생각도 했었지만 아직 여름휴가철인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든 가격도 평소보다 비싸고 번잡할 것 같아서 여행의 설렘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상상만으로 스트레스를 받기에 관뒀다. 월요일이 마지막으로 더운 날 같아서 수영장이라도 가려고 했는데 타이밍도 무심하시지, 월간 출혈이 발행해 버렸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좋은 월요일과 화요일을 보냈다. 오래간만에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19권부터 뽑아 읽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패전 직후 우연히 마을의 선생님이 된 유택이 독특한 건축의 저택에서 겪는 에피소드들이다. 요즘 낮과 밤 할 것 없이 신나게 일하다가도 이 고생의 끝은 대체 뭘까, 지금은 재미라도 있으니 다행이지만 이 것이 과연 내가 지금 이때에 해야 할 일, 하기를 바라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고는 했다. 유택의 고뇌를 따라가다가 나도 유택처럼 답을 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냥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에 이 밑도 끝도 없는 모험을 하고 있구나 하는 발견이 있었다.

 

회사일은 작년여름에 비하면 훨씬 덜 열정적으로 임하지만 그래도 그 간의 경력으로 스스로 발전한 것도 느껴지고, 이제야 시니어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해다. 커다란 프로젝트를 스스로 만들고, 또 주어진 것들과 병행해서 지휘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스타트업에서는 모든 일을 나와 면조가 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잘 모르는 것을 벼락치기로 배워서 하기도 한다. 내가 숫자에 약하다 보니 매번 계산기에 의지해서 답답하다. 영 초심자의 티를 벗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시니어 레벨에서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의 그림을 내가 그려 진행해 나가는 회사일이, 사람들이 나를 믿고 함께 해 주는 등 잘하는 일을 하는 것 같아 재미가 있다. 내 번잡한 기질 탓인지 멀티 태스킹을 해야만 둘 다 잘하게 되는 것 같다. 한우물을 파면 오히려 지루하다고 느껴 흥미도 잃고, 연구해서 더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빨리 대충 끝내고 다른 것을 하고 싶어진다.

 

지난 8월 15일이 첫 제품 생산 1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하루종일 아련하면서 행복한 기분이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일해본 경험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바쁘고 체력도 떨어진 와중에도 시도한 과거의 우리 모두를 크게 칭찬하고 싶은 날이다.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모르는 것을 엄청나게 많이 알게 되었고, 좀 더 스스로를 믿게 된 것 같다. 매일매일 수많은 가치판단을 숨 쉬듯이 해야 하는데 내 판단력이 특별히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충분히 수긍하고 떳떳하게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나를 보조한다는 느낌이다.

 

내일은 노릉의 암치료 후 두 번째 추적검사 CT촬영이 있는 날이다. 새벽부터 금식시켜서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제발 지난번에 보였던 폐의 수상한 것이 사라져 있기를. 한 번 호되게 고생한 우리 노릉이가 앞으로는 별 탈없이 편안하게 가능한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요를은 나이가 들어서 관절이 뻣뻣해지고 원래도 적던 활동성이 더 적어졌다. 그래도 특별히 아픈 곳 없이 잘 지낸다. 강골로 태어난 것 같은 멋진 녀석, 쭉 아프지 말고 천수를 누렸으면. 우리 고양이들과 함께 지구에 존재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상기하면서 살아야지. 사업도 커리어도 두 번째고, 이렇게 보낸 하루하루의 기억이 내 전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역시 집에서만 보내는 이번 휴가도 좋다.

 

오늘부터는 이 지역 여름방학기간이 끝나서 테니스 수업을 다시 시작한다. 연습을 많이 하진 않아서 엉망일 텐데 너무 저질체력 티 나지 않게 오전동안 몸을 좀 움직여 놔야지. 올초부터 배우고 있는 테니스는 아직 잘 치지는 못해도 슬슬 면조와 주거니 받거니 랠리가 되어서 너무 재미있게 치고 있다. 운동도 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도 있고 시작하기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것 중 하나다.

 

또 시작한 것 중에 영웅문이 있다. 무심코 주인공의 외모에 끌려서 ㅋㅋㅋ 사조영웅전 2024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면조가 '영웅문 보는 거야???!!!' 하며 흥분하더니 자기도 같이 보겠다면서 내가 본 곳까지 따라잡고서 이후부터 같이 봤다. 8권인가 하는 긴 책을 30편짜리 드라마로 축약해 놔서 많은 생략이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황용을 연기한 배우가 너무너무 귀엽고 잘해서 황용 캐릭터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반면 곽정은 너무나 바보온달 같아. 하지만 결국 (황용의 개 큰 도움을 받아서) 무림 초고수가 되니까 우직한 무식함도 단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구양봉 역할 배우가 너무 섹시한 외모라 마지막에 돌아이 되어서 큰 웃음 선사했을 때 너무 웃기고 짠했다. 신조협려로 넘어가기 전에 동사서독을 보고 싶다. 책도 읽고 싶은데 영웅문 이 나이에 다 읽으려면 휴가가 한 달 정도 필요할 듯? 뭐 바쁠 것도 없으니 지금 읽는 것(도 엄청 긴 무협) 다 읽으면 시작해도 되겠지. 사업하는 아저씨들이 하나같이 죄 다 삼국지나 중국 고전 얘기 할 때 '혹시 읽은 게 그것밖에 없나? 흥'하는 건방진 생각을 속으로 했었는데, 끌리는 이유를 좀 알 것 같기는 하다. 다양한 출신과 성향의 인물들이 나오고, 나와 현재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은 그중에 어떤 타입인지 끼워 맞춰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역경을 대하는  방식이나 과거에 했던 일이 현재를 돕는 상황 같은 것들을 보면서 '착하게/바르게/떳떳하게/똘똘하게 살아야지' 뭐 이런 결심을 좀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솔직히 잘난 척을 위한 밑밥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다른 픽션에도 끝내주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굳이 삼국지만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다른 건 안 읽나 보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물론 삼국지라도 읽은 자가 안 읽은 자보다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