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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재정비의 시간

11월을 재정비의 시간이라 생각하고 새로운 일을 벌이지 말자고 맘먹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개인사로 바빠서 노력 없이도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을 수 있었다.

 

8월 말부터 노릉이가 눈물 때문에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11월 초에서야 3차 병원으로 트랜스퍼가 되어 최종적으로 비강 종양 림포마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3차 병원에서는 바로 방사선 치료 플래닝과 예약을 잡아줘서 2주간 주 2회씩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화학적 항암치료를 해야 하는 가능성 때문에 자제하고 있었던 스테로이드 약도 처방받아 노릉이가 숨 쉬는 것이 많이 편해졌다. 이제 두 번 더 치료를 받으면 총 삼 주간, 6회에 걸친 치료가 끝난다. 안 그래도 우리 노릉이는 차 타는 것을 싫어하는데, 치료를 위해 왕복 3시간여를 차 타고 다녀와야 하고, 매 번 마취를 해야 하다 보니 노릉의 스트레스와 체력적 부담이 되게 크다. 상태가 안 좋다 좋다 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나도 일희일비하며 아낌없이 걱정하고 살고 있다. 늘 과체중 고양이인 노릉의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았던 지난 11년이었는데, 이제는 노릉이가 제발 밥을 잘 먹기만을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다는 두려움을 현실적으로 느낀 기간이었다. 이제 조금씩 희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회사에서 또 구조조정을 했고, 내가 속한 팀이 영향을 받아버렸다. 매니저를 포함해서 미국에서 고용된 팀원들 전부가 해고되었다. 충격이 너무 컸다. 해고되어 마땅한 사람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은 그런 카테고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꼭 해야 할 일을 의욕을 가지고 스마트하게 잘해서 성과를 내던 사람들이다. 단순히 임금이 비싸고 해고가 덜 비싼 국가에서 고용된 사람들이라서 그냥 잘린 거다. 당장 진행하던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오리무중이다. 팀이 해체되는 위기이다 보니 사람들도 날카롭고 슬프고 화가 나있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데드라인이 있고 딜리버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일을 해야 한다. 한 달여간 매일매일 다른 팀의 사람들도 해고되거나 자진해서 은퇴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인사이동 등을 통해 거의 기존의 틀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당장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정말 갈피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일은 해야 한다. 이 무슨 시간과 정력 낭비인가.

 

내 회사는 가야 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굴러가고 있다. 드디어 개인세무사를 찾았고, 가격정책도 다시 만들어서 내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인근 비투비 유통망을 넓히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첫 분기 부가가치세 사전신고도 했다. 한국어로도 잘 이해 못 하는 세금 용어를 독일어로 처리하려니 충격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해야 하니까 그냥 했다. 난장판 중에서 그나마 지난 첫 분기에 대한 수입 지출 내역은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다. 그 외 책상, 서랍, 파일철, 컴퓨터와 각종 스마트기기들의 파일, 이미지 등 정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다. 마치 사용한 도구를 정리하지 않으면서 요리를 막 만들어서 난장판이 된 주방과 같은 상태다. 사실 11월의 재정비는 이런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새 11월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재정비의 과제들은 12월로 대부분 넘기게 되었다.

 

요즘 독일 날씨는 지독할 만큼 흐리다. 해 구경을 전혀 못하는 날이 한 달이 넘었을 때는 정신 상태가 어찌나 안 좋던지 누군가가 인스타그램에 햇빛 비치는 실내 사진을 올린 것을 보고 화가 나더라. ㅋㅋㅋ 지난 주말에 잠깐 해가 비치는 날이 이틀정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주 조금 누그러들었다. 두 달 넘게 감기도 걸릴락 말락 머리, 코, 목, 몸살 기운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확 무너져 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서 쉬어주고 있다. 어지간하면 약을 처방해 주지 않는 이 나라에서 배운 온갖 민간요법을 써보고 있는데, 효과가 꽤 있긴 하다. 자기 전에 스트레칭하기,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한 소금물로 가글 하기, 하루종일 물 많이 마시기 같은 것들.

 

지난 두어 달간 '와 진짜 너무 힘들다' 싶은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연말과 앞으로는 좀 더 편안해지는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운동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열심히 만들어둔 근육들 덕분에 올 한 해 달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슬슬 목과 등허리가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