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출신 대만에서 활동하는 작가 찬호께이의 추리소설 [13.67]은 사실 올 초에 읽기 시작했다. 6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3개쯤 읽고 한동안 다른 책을 읽거나 다른 걸 하고 놀다가 한 편 더 보고, 부활절 연휴를 맞아 나머지 두 편을 다 읽고서 작가의 후기나 편집후기까지 아껴서 꼭꼭 씹어 다 읽었다.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6편의 단편이 하나하나 전부 완성도가 높고 재밌었다. 형사 관전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1967년부터 2013년까지 오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홍콩에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명탐정 형사의 활약, 시대에 따른 사회의 변화와 가치관의 변화 등등 홍콩의 근현대사까지 버무려서 보여준다. 나는 원래도 '정의'가 뭔지 고찰하고, 본인의 직업적 사명을 철저하게 믿고 수사하는 뛰어난 인물을 중심으로 한 형사물을 너무 좋아한다. 13.67은 이런 나의 취향을 저격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로도 긴박한 전개와 복잡한 트릭, 그리고 반전까지 놓치는 거 하나 없는 너무나 재미있는 추리소설인데 이제 그 배경이 되게 매력적인 홍콩이다. 홍콩에 가본 적 없는 나는 처음에는 인물들의 이름이나 지명이 좀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전개를 워낙 잘해나가서 그런지 첫 3-4장만 집중해서 읽으면 이후로는 생소한 이름과 지명은 문제 되지 않았다. 나는 특히 마지막 두 편이 굉장히 재밌었다. 아무래도 처음 네 편을 읽으면서 뛰어난 추리력과 심각하게 투철한 직업의식에 놀라워하며 관전둬라는 인물에게 빠져들었기에 그의 젊은 시절이 궁금해졌기 때문도 있고, 6-70년대의 인터넷과 씨씨티비, 디지털 기술에 의존해서 사건을 해결하던 시대가 아닌 배경의 형사물 나름의 맛이 있는 데다가, 내가 본 많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작품 중에서 영국의 시한부 통치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의 홍콩을 묘사한 작품은 또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두 편에서 관전둬란 인물이 완전히 명탐정으로 여물기 이전의 모습도 볼 수 있고, 어떤 계기로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찬호께이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려고 한다.
하라 켄야가 쓴 '저공비행 - 또 다른 디자인 풍경'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하라켄야의 책을 교양서로 읽으며 커온 나로서는 되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형식은 하라 켄야가 생각하는 일본의 아름다운 점을 절묘하게 포착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보여주고 경험하게 할 수 있는 관광자원 개발 아이디어 모음집이다. 읽으면서 와 정말 그렇네, 이런 방식 너무 좋겠다, 나도 가보고 싶다, 기차 여행과 식당칸 그립다 같은 생각을 했으니 한 편 한 편 글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글들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건축, 지역 개발 등의 커다란 사업과 인프라 구축을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를 직접 시작하고 굴려 나가는 이 디자인계의 큰 손 같은 인물이 가진 힘과 추진력이 부러웠다.
오스턴 연휴동안 책 말고 또 본 것은 재주행을 완료한 드라마 심야식당 시즌3, 그리고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로 리메이크한 '삼체'다. 삼체는 2권 중반까지 읽다가 좀 현타 오는 포인트가 있어서 읽기를 중단하고 있었다. 1권을 읽을 때는 아이디어가 너무나 흥미로워서 쉽게 많은 분량을 읽어냈지만 사실 재미있었냐고 하면 또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운 독특한 소설이었다. 전지적 3인칭 시점에서 심경묘사나 인물 간의 갈등 같은 것은 거의 배제하고 사건의 진행만 묘사하는 방식이어서 좀 성경책 같다는 생각조차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부로 넘어갔더니 그동안 어렵사리 정을 붙인 인물들이 싹 물갈이 되고, 형사 스창만 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 나와서 다시 이 환장할 상황을 새 인물들을 중심으로 파악해가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외계인은 인류한테 정 떨어진 것 같고 ㅋㅋㅋㅋ 400년 후 오긴 오는 건지 잘 모르겠고, 3부 끝까지 읽어나갈 의미가 있는지 확신이 안 서서 읽기를 멈췄다. 넷플릭스가 리메이크한 드라마는 원작의 큰 궤는 가져가면서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서양인의 관점에서 리메이크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물들을 원래 알던 학교 동문으로 바꿨고, 각자의 관계에 많은 설정을 주었으며, 인물 하나하나의 내면적 갈등까지 묘사했다. 이 것은 내가 느끼는 동양과 서양의 큰 차이 중 하나여서 이 차이점을 직접 관찰하는 게 재밌었다. 내가 생각하는 동양의 사상은 다 같이 힘을 합춰 이뤄야 할 목표가 있을 때는, 사람 개개인의 심리나 갈등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인물과의 관계나 약속이 큰 뜻(대의)과 어긋날 때 갈등이 생기기는 한다. 또는 스스로의 신념과 대의의 신념이 어긋날 때 선택을 해야 해서 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갈등이 생긴다거나 친구냐 애인이냐 이런 건 이렇게 태양계끼리의 싸움에선 중요할리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삼체의 건조한 문체를 수긍하며 봤다. 하지만 역시 이런 사상으로 쓰인 글은 극 한 편 한 편의 재미는 없다. 그래서 넷플릭스의 넷플릭스적인(치정과 리더십, 살인 등이 추가된) 해석과 각색이 극을 더 재미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딱 내가 읽기를 멈춘 지점의 얼마 전에서 시즌 1이 끝났다. 아무래도 중단했던 읽기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뒤 이야기가 다시 궁금해졌다. 디스토피아를 이런 스케일로 게임과 사이비를 절묘하게 섞어서 적과 그들이 우릴 침략하는 이유를 보여주다니. 게다가 중국인으로서 근현대사에 있던 비극을 대담하게 소재로 차용해서 쓰다니. 류츠신은 멋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에 대한 너무나 설명적인 부분, 인물의 갈등에 대해 너무나 무심한 부분은 소설을 조금 재미없게 만들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