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Journal

아름다움을 곁에 두기

아름다운 자태의 요를레이

 

1월 들어 읽은 책이 두 권 있다. 마르셀 서루의 소설 '먼 북쪽'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에세이 '그늘에 대하여(음예예찬)'다. 작년부터 읽고 있는 삼체 2권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결국 병행으로 다른 책을 읽게 되었다. 삼체 1권은 정말 어마어마한 설정에 흥미롭게 처음부터 끝까지 꽤 분량이 많은데도 단번에 읽은 편인데, 2권은 싹 바뀐 인물들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고, 그 인물들이 겪는 이해의 어려움을 나도 겪느라(대체 왜, 하필 이 인물이, 그리고 이 인물은 이미 죽고 없을 수백 년 후의 일에 대비해야 하는가) 진도가 잘 안 나간다. 개인적으로 되게 웃겨하면서 읽었던 우스꽝스러운 삼체 세계에 대한 게임을 통한 묘사가 2권에는 더 이상 안 나오니 그것도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아무튼 뒷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계속 천천히 읽겠다.

 

'먼 북쪽'과 '그늘에 대하여'는 어쩌다보니 되게 상반되는 하지만 하나의 궤로 통하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소설과 에세이였다. 바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먼 북쪽은 모종의 이유로 인류가 살기 어려워진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의 생존을 위해 보여주는 처절함과 어리석음을 끝없이 묘사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끔씩 주인공이 추억에 잠기는 기존 인류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진보하고 아름다웠던 문명의 묘사가 아련하게 느껴진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에세이는 1930년대쯤 쓰인 것인데 몇몇 일본의 전통문화에 대한 해설과 그와 함께 하는 생활의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한다. 워낙에 오래전에 쓰인 글이고, 두 세기 전에 태어난 일본 남성 노인 작가의 글이니까 감안하고 봐야 할 것들도 많지만, 음예예찬을 쓰게 만든 코어에 있는 어떤 메시지에는 수긍이 갔다. 아름다움을 곁에 두고 살아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노력과 희생은 감수해도 기쁘다는 것. 먼 북쪽에서 주인공 '나'가 결국에는 부질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했던 행동들이 떠오른다. 가령 장작으로 쓸 수도 있는 피아노를 그냥 두고 맞지도 않는 음을 연주하는 음악감상용 도구로 쓴 것이나 먹을 것을 심어도 되는 땅에 꽃을 심어 가꾼 것과 같은 행동 말이다. 희망이 하나하나 거세되어 암담하기만 한 나날 중에도 그렇게 애써서 포기하지 않는 삶의 작은 아름다움이 오히려 더 찬란하게 비쳐 보여서 희망을 주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무척이나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 속한다. 잘 정돈된 집을 유지하고 싶기에 청소와 집관리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한주를 계획할 때 청소나 집안일을 위해 할애해야 할 시간을 먼저 생각해 두는 편이다. 가끔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지쳤거나 다른 일 때문에 주방이 어수선하고 선반에 못생긴 것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고 지내야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둘러봤을 때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단정하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정원에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몇몇 허브를 제외하고는 거의 심지 않았는데, 정말로 많은 한국인 지인들로부터 '왜 깻잎, 호박, 기타 등등 먹을 것을 심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아오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꽃 심을 땅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편인데, 왜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집안정리를 끝없이 하는 것과 같은 이유인 것 같다. 먹을 것은 상대적으로 키우는데 손도 많이 가고 꽃이 져서 열매를 맺기 때문에 예쁘게 감상할 수 있는 시기가 짧다. 또한 성공적으로 관리를 해서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고 쳐도, 이 정도 면적의 땅에서 기껏 수확해 봐야 한두 끼 신나게 즐길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장미 같은 꽃은 4-5월부터 9월까지 계속해서 피면서 너무나 기쁜 장관을 만들어 준다. 매일 창밖을 내다보면서 저마다 다른 장미의 빛깔에 감탄한다. 당연히 장미가 훨씬 이득이 아닌가?

 

두 세기 전 일본인 남성 노인이라 내가 어지간하면 좋아할 수 없음에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책을 읽으며 미소 지은 부분들이 있다. 바로 고양이에 대한 예찬을 하는 부분. 호들갑스럽지 않은 문체로 고양이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을 표현해서 너무나 공감되고 좋았다. 나도 늘 굉장히 우아한,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양이의 꼬리 움직임인데, 이를 부러워한 부분을 읽으며 반가웠다. 이 글에 첨부한 우리 요를의 멋들어진 꼬리도 그렇고, 고양이의 꼬리는 정말 그 자체로 멋지다. 또한 움직임에 프레임이 많은 편인데(움직임이 부드럽단 소리), 그래서 움직임의 속도가 빠르지 않고 우아하다. 고양이도 개들처럼 꼬리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쓰기도 하는데 바짝 올라가서 끝에만 살짝 세리프 서체의 장식돌기처럼 꺾인 모습은 비율도 그렇고 우아함과 발랄함이 공존한다. 또 그 의미가 '고양이가 행복하고 기쁜 상태'이니 그 모습을 살면서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 장수의 비결일 것이다. 기쁠 때뿐 아니라 주변의 소음이나 인간이 부르는 것이 성기실 때나 '오냐 듣고 있다' 수준의 응답용으로 C자로 휘어져 있는 꼬리 끝을 살짝 들었다 탁 내려놓는 움직임도 어찌나 절도 있고 멋진지. 모든 형태와 움직임이 진부하지 않음에도 의미를 확실히 전달한다.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인 우리 요를레이, 노르망디와 사는 것이 내가 이 둘을 얼마나 내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주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