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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연말에 느끼는 부채감

폭신한 쿠션들 위에 앉은 눈꼽이 귀엽게 낀 요를레이

 

스마트폰, 카메라(DSLR), 아이패드들, 그리고 필름카메라까지. 갖가지 기계로 찍은 사진들이 있다. 대충 스마트폰 시대부터만 헤아리더라도 약 15년간 사진을 주야장천 찍어왔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난 전혀 정리하거나 한 군데에 모아두지 않고 살고 있다. 대체 사진 정리란 것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15년간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해 왔고, 아직 대답은커녕 언제 제대로 고민하기 시작할지조차 모르고 있다. 점점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좀 도움이 되어 주겠지만 언젠가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다.

 

연말이 되니까 이런 '미처 끝내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일단은 시작하고 엔딩을 보지 못한 게임, 완독 하지 못한 책들이 떠오른다. '우리 한 번 밥 먹자, 만나자' 약속해 두고 아직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 떠오른다. 어쩐지 올해 안에는 만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 사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끝내지 못한 게임이나 책,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인생의 숙제 같은 것들은 그저 기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 사실은 안 해도 별로 상관없는 것들. 좀 더 나아가 보면 학위 취득, 연애,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어떤 관문처럼 여겨지는 것들도 그렇다.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남들이 하니까 그냥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들. 많은 사람이 젤다 왕눈을 플레이한다고 해서 게임을 안 하는 사람이 본인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는 않는데 말이지. 사진정리도 그런 것 중 하나겠지.

 

한 편으로는 이런 연말이나 연초같은 인류가 공유하는 시기적 분기점이 존재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의미의 마감일을 설정할 수 없을 경우 편리의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까. 가령 올해 안에 건강검진을 받는다든지. 물론 나는 실패했다. 내년으로 미룰 것이다. 하지만 생일 전에는 받고 싶다.

 

나는 내일까지 일하고 다음주에는 죽 쉬다가 금요일에만 잠깐 출근해서 슬렁슬렁 정리할 것 하고 한 해의 업무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연말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 쓰고 사라지는 이 서구문명의 회사에서 지내다 보니 연말에 더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감도 있다. 올 해는 후반부에 일을 정말 신나게 했다. 내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팀의 구조와 리더가 바뀌어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내년에도 쭉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