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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근미래의 나

Designers think about... 저 질문들을 보고, 특히 마지막 질문을 얼마나 뺴먹지않고 정성스럽게 던지며 일하고 있나 고민했다.

큰 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디자인 뮤지엄을 찾아본다. 유럽에 살다 보니 기회가 종종 온다. 이미 바우하우스는 100주년을 넘어섰고, 디자인이란 주제만 가지고 산업이 발달한 큰 도시마다 커다란 박물관을 채우고 남을 역사가 쌓였다. 내가 푹 빠져서 공부한 분야가 쌓아 올린 역사여서 약간 자랑스러운 기분도 든다.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에는 커다란 벽에 시대를 대표했던 디자인 제품의 실물들이 콜라주 되어 있었다. 그중에 내가 가져봤거나 가지고 있는 것들이 제법 많았다. 좋은 디자인의 제품은 외형이 보기 좋고, 내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그 것을 사용함으로써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더 수월하고 즐겁게 하도록 한다. 그런 이유로 최저가 또는 가성비가 우월한 다른 제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사서 사용 할 가치가 있다. 그런 제품들을 잘 골라서 전시해 뒀다. 사실은 그런 제품이 지난 100년 동안 넘치도록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디자인 뮤지엄들은 비슷한 콘텐츠를 전시한다. 다만 그것을 어떤 줄기의 이야기로 엮어 푸는지는 큐레이터의 관심사에 따라 다르고, 따라서 미처 스스로 고민해보지 못한 관점을 제시해 준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마침내 현재의 직업과도 연관이 깊은, Designer, User, Maker (제목의 단어 순서는 다를 수도)가 주제였다. 전시 관람을 통해 사용자와 디자이너는 제품이란 미디엄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관계임이 약간 더 물적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다.

 

디자인 뮤지엄 뿐 아니라 그 도시의 대형 슈퍼마켓을 브랜드별로 탐방한다든지, 주방용품-생활용품-가든용품을 파는 가게가 보이면 반드시 들어가 보고, 지역 로스터리 카페에서 한 잔, 지역 양조장이 보이면 또 한 잔, 역사가 깊어 보이는 펍의 탭을 유심히 보고 맛있어 보이는 것이 있으면 또 한 잔. 살면서 관심사가 많이 바뀌어서 2005년에 처음 도쿄로 해외여행을 갔던 때, 2007년 남미를 여행하던 때, 그리고 2012년에 처음 런던을 와봤던 때 등 과거의 나의 여행들과 현재를 비교하게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어디를 가든 반드시 그곳의 화방을 찾았었다. 중학생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에 하루 중 가장 길고 순도 높은 시간을 보냈었기에 새로운 재료와 도구를 구경하고 사서 써보는 것이 크나큰 기쁨이었다. 여행을 가면 늘 보던 제품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컬렉션을 보게 되어서 항상 흥분해서 매장 안을 꼼꼼히 살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길 가다 본 멋진 화방을 두 개나 그냥 지나쳤다. 사실 마지막으로 여행지에서 화방을 찾은 적이 언제였다 생각해 보니, 2017년 즈음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안 사서 나오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오래전이었을 수도 있다. 대신 화방의 자리는 다른 주제가 채워나가고 있다. 서점, 도서관, 베이킹용품점, 가든용품점, 공원과 정원, 백화점 주방용품 코너, 유기농 제품들을 파는 곳, 도시와 건축, 생활 역사를 전시하는 뮤지엄, 기타 등등.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제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내 매일의 삶은 어떻게 채우고 싶은지 더 고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거리를 하염없이 걷거나, 일부러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이층 좌석에서 야경을 구경하면서 지난 열흘간 오랜만에 대도시에서 생활을 하며 좋았던 점과,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런던은 말이 잘통하고, 어쩐지 익숙한 유럽의 도시 느낌이어서 적응이 필요 없는 맘 편한 도시였다. 지내는 곳이 또 마침 시내 한복판이라 봐도 될 만큼 교통이 좋은 곳이어서 가고 싶던 곳들을 쉽게 갈 수 있었다. 전시를 보거나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는 것이 내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들을 계속해서 체험하다 보니 믿음이 생겼다. 돌아가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자진해서 문화생활을 위한 외출을 해야지. 친구들이 만나자는 거 귀찮음에 져서 거절하지 말아야지. 런던이 생활무대고, 하루하루 바쁘게 살고 계실 텐데도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주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약 오 년 만에 혼자 길게 여행을 했는데, 이런 시간이 나에겐 정말 필요하구나 싶음을 또 느꼈다. 남의 영향이 거의 없이 하루를 내 의지로 챙겨서 채워 넣는 것.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내게 전혀 여행지가 아니다. 이제 정말 한국 방문은 최소한으로만 하고, 돈과 휴가와 에너지와 탄소발자국을 아껴서, 유럽에 사는 동안 방문해 보고 싶던 곳들을 다녀봐야 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도 든다. 근데 또 한편으로는 당분간 긴 여행은 하고 싶지 않다. 스키 일주일 다녀와서 또 2주간 내 고양이들, 내 일상과 떨어져 있었더니 몸이 축나는 느낌도 든다. 아무튼 앞으로의 나날은 좀 더 활기차게 보내고 싶은 다짐을 안고 돌아가겠다. 일단 런던에서 남은 날들을 신나게 잘 보낸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