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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여행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잃어가는 이유

앞마당 관리의 날. 2층에서 바라본 풍경.

1. 정원

이사 온 후 뒷마당 정원만 열심히 관리했고 아침에만 잠깐 해가 들고 하루 종일 그늘이 진 앞마당은 많이 소홀했는데, 수국도 하나도 피지 않고, 통로 건너편 장미랑 나무들도 다 죽어가는 것을 보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둘 다 약속 없는 토요일을 맞아 오전 중청소 후, OBI에 가서 바닥에 덮을 나무 조각들이며 필요한 물건을 잔뜩 사 가지고 왔다. 꽃나무들이 심긴 땅의 수분 보호를 위해 나무 조각들을 깔고, 장미랑 사철나무를 뒤덮은 덩굴 잡초들을 싹 제거하느라 일요일 오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했다. 정원 관리는 정말이지 힘이 많이 들고, 온갖 참신한 벌레들을 만나야 해서 고달프지만 그래도 하고 나면 되게 뿌듯하다. 생활의 행복에 기여가 큰 취미 중 하나라니까 내가 선택한 취미는 아닐지언정 열심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마당과 뒷정원을 합하면 우리가 관리해야 할 면적이 꽤 넓은데, 덕분에 뒷 정원은 가까이에서 눈에 보이는 곳을 제외하고는 잡초들의 정글이 되어가고 있다. 장미나 꽃가지를 전정하고 물 주고 하는 것만으로도 주중에는 더 이상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름의 여러 주말을 놀러 다니느라, 약속 때문에 관리 없이 소홀하게 보냈더니 올해 수국도 피지 않았고, 폭염 때문에 꽃나무들도 말라죽어가고 있다. 열흘 정도에 한 번씩 비료를 주고 있는데 그것과 더불어서 땅의 수분관리에도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다니. 정원관리는 정말 고급스러운 취미다. 아무튼 이런 정원을 두고 여름에 장기간 휴가를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비가 자주 오는 시즌이 되어야만 비로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2. 고양이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 할 사람, 우리 집 고양이들을 돌봐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있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애들이 편하게 있지 못하는 기간을 굳이 갖는 것이 싫다.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이제 열 살을 넘긴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돌봐 줄 사람은 아무래도 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임감이 나보다 덜 한 남집사의 경우는 자꾸 뫄뫄들에게 맡기고 어디 여행 가자, 한국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 유럽 내에서 짧은 여행이면 몰라도 굳이 둘이서 한국을 몇 주나 가느라 애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놔야 하는 이유에는 여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3. 숙소

숙소 선택에 있어서 엄청 까다로운 기준을 추구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이사온 집과 주변 환경이 마치 휴양지의 조용한 마을 속 독채 같다 보니 이런 좋은 숙소를 두고서 굳이 하루에 백유로 가까이를 지불하고서 컨디션이 떨어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싶지가 않다. 이 집 이전에는 작은 빌라나 아파트에만 살았어서 가끔씩 삶의 공간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여행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호캉스도 좋아했고, 여행을 간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싶은 멋진 공간의 숙소를 예약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 다 의미 없게 느껴진다. 내 집만큼 넓고 쾌적하고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사랑하는 고양이들이 살고 있고, 편안한 곳은 찾기 어렵다.

 

이국적이고 멋진 자연을 살아볼 수 있는 휴양지라면? 원래도 휴양지로 휴가가는 것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여러 좋은 점들은 공감하지만, 일단 휴양지들은 대부분 교통편이 한정적이어서 여러 번 환승을 해야 하고, 따라서 여정에서 소요되는 시간이 많다. 그렇지 않은 몇몇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들은 사람이 많고, 비싸다.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현지에서 야외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좋아하긴 하지만 안 해도 억울함이 전혀 없을 만큼만 좋아한다. 그리고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음식과 술은 아무래도 특색과 퀄리티, 옵션의 다양성 면에서 도시를 여행하는 것에 비해서 기대치를 낮춰야만 한다. 그런데 숙소조차 평소에 지내는 집보다 매력이 없다면 도무지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점점 더 휴양지에 대한 관심은 없어지고 있다.

 

4. 기본적인 권태와 지식 부족

사실 이 것이 내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다. 판데믹이 엔데믹으로 전환하며 세계여행이 다시 가능해진 이때 '리벤지 트래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눌러왔던 여행의 욕구를 터뜨리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나는 뭐가 문제인가 고민하게 된 것이 이번 일기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문제는, 어딜 가든 여행지마다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유럽의 소도시들이 아니 아마도 문명이 가꿔온 도시들이 가진 특성상 비슷비슷한 패턴이 있는데, 이젠 더 이상 차이점과 새로움에 놀라워하는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주제의식을 통해 여행의 테마를 만들어야만 그나마 재미가 있어진다. 20대 초반에 남미나 아시아 국가로 떠날 때에는 단순히 호기심만 잔뜩 들고 가서 걸음걸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게 구경하며 다녔었다. 이젠 공부를 좀 하고 가지 않으면 아는 것 이상은 보이지 않는 채로 돌아오게 된다. 아무래도 글로벌리제이션이 가속화되어 그렇기도 할 것이다. 시내의 상점들은 대부분 익숙한 브랜드의 거대 비즈니스들이고, 파는 품목들도 거의 평준화되었다. 돌아다니기 편리해진 면은 있지만 재미는 확실히 떨어졌다. 

 

내가 지역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어서 발견할 것이 많지 않음도 커다란 원인 중 하나다. 예전에는 아무래도 여행경비를 일년넘게 저축을 한다든지 해서 모아서 떠났었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충분한 시간 동안 현지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주는 여러 가지 지식과 예술품을 미리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휴가비에 대한 걱정보다는, 시간이 난 김에 그 시간을 써야만 해서 여행을 가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지 선정도 로망이나 호기심보다는 접근성에 기준을 두고 결정할 때가 많다. 관심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해당 국가, 도시가 배경인 영화를 챙겨 보거나 책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비용이나 시간을 절약하면서 미션을 수행할 방법을 리서치한다. 그러다 보니 미지를 탐구하는 느낌이 더이상 들지 않는다. 시각정보가 너무 이미 광범위하게 접근 가능해서 구글맵만 둘러봐도 충분한 정보를 얻고 간다.

 

5. 환경에 대한 걱정

이런 생각은 판데믹이 시작되고 나서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레타 툰베리가 비행기 대신 배나 기차를 타고 남부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미디어에서 보면서 비로소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생각보다 더 탄소배출을 많이 하고, 1 세계에 살지 않는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주어진 특권을 즐기는 것도 사는 즐거움 중 하나여서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꼭 갈 필요 없는 여행을 가면서 배출할 필요 없는 많은 양의 탄소를 추가로 배출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가급적 유럽 내에서는 기차나 버스, 자가용을 이용해서 이동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여행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1번과 2번의 이유로 인해 더더욱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닌 이상 떠날 계획을 하지 않게 되었다.

 

평소에는 주로 채소로만 구성된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자리잡았는데, 여행지에 가면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특별히 다짐을 하지 않으면 매 끼니 육식을 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행이 있을 경우 내가 꼭 먹고 싶지 않더라도 육식이나 해산물이 메인인 식사를 하게 된다. 아무튼 집에서 가만히 지내는 것보다는 추가로 환경에 위해를 끼치며 다니게 된다. 따라서 여행의 횟수를 줄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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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사실 오래 전부터 나그네와 저긴 꼭 가보자고 했던 이탈리아 남부다. 나폴리의 몇 대째 이어져 경영해오고 있는 투박한 피자집이나 시칠리아의 자연이 키운 원재료가 다 하는 단순한 음식들을 먹으러 가고 싶다. 모두가 극찬하는 남부 이탈리아의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절경도 궁금하다. 요즘엔 가뭄이 심해서 단수도 심심치 않게 하고 여러모로 사정이 좋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유럽에 사는 동안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 차를 끌고 집에서부터 출발해서 알프스를 넘어 풍경이 바뀌는 스펙트럼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아직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올해 하반기에 가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1, 2, 3번의 이유 때문에 미리 피로감이 든다. 그래도 최근 3년여간 잊고 산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기대는 된다. 무엇보다 감자 말고 맛있는 것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