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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폭염이 지나간 여름

뜨거운 날씨 새파란 하늘

이사 온 집에서 처음 맞는 여름은 정말로 뜨거웠다. 유럽 대륙을 바싹 구워버린 폭염 때문이었다. 모두가 더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내용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들렸지만 막상 나는 작년이나 재작년 여름보다 수월하게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작년 여름은 간간이 쏟아지던 스콜 때문에 습해서 힘들었고, 재작년 여름은 뜨겁고 또 뜨거웠다. 43도란 숫자를 봤던 것도 같다. 올 해는 내가 겪은 최고 기온이 41도였다. 아무튼 40도가 넘는 더위라니 심각한 기후위기가 체험된다. 매 년 가속화되는 기후위기와 더불어 올 해는 전쟁이 진행 중이고, 에너지 크라이스가 심각하고, 식량위기도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어서 물가가 실시간으로 오르는 것도 체감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무서운 여름이다.

 

반면 내 집에서는 비교적 안락하게 보내고 있다. 지하실은 매우 시원해서 저녁에 티비를 보거나 할 때 긴팔을 챙겨 입고 내려가야 할 수준이고, 주방과 거실이 있는 1층은 딱 좋은 실내온도를 계속 유지 중이다. 침실과 오피스가 있는 2층은 저녁엔 달궈진 기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기는 하지만 지붕 아래 공간 덕분인지 심하지 않다. 저녁에는 기온이 좀 내려가니까 큰 창문을 다 열고 방을 식히고 잔다. 자동차도 차고에 넣어두니까 한낮에 탈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오븐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는 정원에 물 분사 중인 기계를 바라보면서, 이미 주변 집들이 가뭄 때문에 일부러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을 멈추고 말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심난한 기분이 들었다. 파랗고 예쁜 정원을 보기 위해 이렇게 물을 계속 줘야 할까? 나도 그냥 멈춰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이번 주 금요일에 비 소식이 있던데 제발 비가 왔으면 좋겠다. 너무 건조하다. 참으로 럭셔리한 고민이다.

 

이번 여름은 이직처를 찾고 지원하는데에 힘쓰고 있지만 불경기와 휴가철이 겹친 시기여서 공고도 많이 없고, 프로세스가 맘처럼 잘 진행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머리로는 이 상황이 내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여유를 찾지 못하고 계속 힘들었는데, 장기 숙박 손님까지 있어서 신경을 쓰다 보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이젠 다 끝났고, 깨끗하게 다시 집을 청소하고, 푹 쉬고, 내 지인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잘 회복했다. 아무튼 이 폭염 구간과 더불어 나를 한동안 힘들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제는 이직은 좀 더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 한 것들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면접을 보면서 스스로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계속 배워가고 있으며, 그런 것들을 보충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좀 멀리 봐야 하는 목표를 잡은 만큼 조급해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책 보고 강의 보고 지금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정성껏 해나가고 하다 보면 뭐 언제든 계속 기회란 있겠지 싶다. 이런 마음가짐은 결국 심신의 편안함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것이니 내 생활의 안정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맘 깊이 깨달았다.

 

Flair Signature로 에스프레소 내리는거 맛도 좋고 되게 재밌다.

벼르고 벼르던 수동 에스프레소 기계를 샀다. 이미 맛있는 온갖 종류의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장비들이 내게 있고, 이사오면서 그라인더도 업그레이드를 했지만, 에스프레소 기계를 갖는 것은 계속해서 미루고 있었다. 모카포트로 가끔 추출해 먹는 진한 커피로도 충분했지만 결국 머신을 산 이유는 스트레스 구간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력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기간이므로 뭔가 보상이 필요했다. 결론은 아주 만족하고 재미있게 추출법을 연구하며 지내고 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실 순 없어서 하루에 두 번 이상 연습을 못하기 때문에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아침에 그라인드 세팅을 이렇게 바꾸고 추출 시간은 얼마큼 늘리면 어떻게 다른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하면서 잠에 든다.

 

컨디션을 좋게 유지하기 위한 루틴을 수행하고,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면서 새로운 인풋을 가지고, 집안을 쾌적하게 유지하고, 식물을 돌보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하루를 바쁘고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당분간 너무 스스로에게 부담 주는 계획 없이 남은 더위를 잘 지내보는 것이 좋겠다. 번아웃 안오게 조심조심 잘 대해줘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