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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ing/From Design to UX

나는 과연 이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째서 벌써 4월인거지

대답은 당연히 '할 수 있다'이다.

 

이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작년 초부터 했다. 하지만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정신적인 힘이 부족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우울감과 무기력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이해해주고 싶다. 작년 후반기부터 서서히 나아지기는 했다. 이사를 했고, 새 해가 되었고, 엄마의 첫 번째 기일이 찾아왔고, 한국에 다녀왔다. 독일에 돌아와서 코로나에 걸렸다가 회복했다. 시간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 방향을 틀려는 의지를 가지고 노를 젓지 않으면 크고 센 물줄기만을 따라 흘러가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다니는 회사와 포지션은 과거의 내가 바랐던 것이다. 최선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만족스러운 직장이다. 이 곳에서 4년여를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동료들과 즐겁게 일했다. 하지만 더 이상 오래 머무르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UX 디자인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나는 이제는 전통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커뮤니케이션(그래픽, 웹, 모션,...)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팀의 직군 중 하나인 UX 디자이너로 길을 옮겨왔다.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에서였다. 여러 직군이 한 팀을 이뤄 협업하는 어자일 환경, 스크럼 프레임워크, 또한 학부 때부터 훈련해 온 디자인 띵킹 프로세스에 대한 이론서와 실용서를 읽으며 '이상적인 방법론처럼 보이는 이 것들이 실무에 얼마나 적용이 가능한가?'가 궁금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일을 처리해주는 대리인으로서의 취급 대신, 문제를 발견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가는 팀워크의 과정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기업경영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파트너 커뮤니케이션/리소스 채널인 플랫폼을 경영하는 팀에서 일하면서 앞서 궁금했던 사항들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UX직군들이 쓰는 전문용어가 익숙하지도 않았고, 방법론도 하나씩 배워가며 적용하는 도전을 해야했다. 하지만 이제는 디자인 팀을 운용하면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와 시점을 바꿔가며 대화할 수 있는 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반복적인 피쳐 개발 프로세스보다 좀 더 개괄적인 전략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시장에서 더 높은 가치로 평가받는 직군의 일과 현실이 궁금하다.

사실은 같은 스크럼 팀 안에서 다른 동료들과 대등한 중요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디자이너'에 대한 시장의 대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최근에는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사실 아직 디자이너로서 더 클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이대로 디렉터나 디자인 매니저가 되어 보다 큰 팀을 운용하는 미래도 멋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우물만 깊게 파는 취향이 아니다. 공부도 디자인 외에 경영학을 또 전공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빨리 해보고, 재미도 있고 필요성에도 공감하면 좀 더 많이 했다. 디자인 직군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니 이제는 경영직군으로도 일해보고 싶다. 게다가 같은 스크럼팀 안에서 '가격'으로 좀 더 나은 대우를 받는 프로덕트 매니지먼트 일을 하게 된다면 지금 즐겁게 하고 있는 일의 내용과 가치관을 유지한 채로, 다른 기능을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새로 배워야 할 것도 많고 당분간 지루할 틈 없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 조직과 팀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실 지금 일하는 팀은 내가 학생으로서 용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사람들과 정이들고 운이 좋아서 졸업 후에도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었다. 비자와 생활비 걱정 없이 여태까지 잘 지냈으니 정말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 팀 안에서 성장하기엔 뚜렷이 그어진 한계가 있다. 일단 이 팀은 프로덕트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지만 마케팅 부서 소속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업무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다. 그 안에서 개발팀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다. 일단 보스들이 전부 마케팅을 하는 사람들이니 개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따라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팀이 마케팅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팀도 아니다. 중요한 채널인 플랫폼을 유지 보수하고 있지만 전부서와 KPI가 다른 섬 같은 존재다. 이로 인한 부작용은 굉장히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산 등의 지원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승진을 하고 팀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지난 4년간 나로서도 팀의 visibility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20년 30년씩 이 팀에서 이렇게 일한 동료들의 매너리즘을 마주칠 때마다 힘이 빠진다. 또한 플랫폼을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기는 수많은 잡무도 문제다. 나는 우리 프로덕트 사용자들을 위해 플랫폼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데, 하루의 절반 정도는 우리 플랫폼을 이용해 마케팅 업무를 하고 싶어 하는 사내의 다른 동료들의 콜센터 상담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한 편으로는 한 팀, 한 부서, 한 회사에서 20년 이상 일한 장기근속 직원이 많은 팀은 정말 좋은 팀이다.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회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서도 말한 동료들의 매너리즘을 자주 접하면서 나도 점점 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됨을 관찰했다. 4년간 앵무새처럼 모바일 사용자 경험의 중요성, 일관적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중요성, 접근 가능성 향상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협업인들의 결과물을 보면 힘이 빠진다. 반박하지 않고, 듣기 좋은 소리나 해주면서 일을 처리하면 내 평가도 올라가고 에너지와 시간을 아껴서 저녁이 있는 삶을 넘어 일하는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길게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일과 삶의 발란스에서 삶의 비중을 좀 높여도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이 팀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하루의 8시간은 의무적으로 회사일을 하기로 계약했는데, 이 8시간 동안 생산해내는 아웃풋이 그저 그런 수준에서 맴도는 것은 나로서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성취를 굳이 이뤄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좀 더 기대를 받을 수 있는 무대로 옮겨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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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꽤 고통스러운 이직준비 과정 중에 있다. 지난 4년간 아무런 기록과 반성을 하지 않았던 탓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자료를 만드는 데에 많은 심신의 에너지를 쏟고 있다. 게다가 살면서 이러한 이직 준비는 처음 해본다. 학생에서 프리랜서로, 프리랜서에서 직장인으로, 자영업자로, 다시 학생으로 그리고 다시 직장인으로 변신만 쭈욱 했었다. 비슷한 일과 분야를 유지하며 직장만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노력은 처음 해본다. 그래선지 몰랐던 부분을 많이 배우면서 하고 있다. 목표는 올해 안에 위에 적은 방향으로 팀이나 회사를 옮기는 것이다. 귀찮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읽어보기 위해 이직준비자의 초심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