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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스위스 양조장 투어. 빡세고 아름다웠던 3박 4일

스위스의 말도 안되게 멋진 풍경. 호수와 산을 실컷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면조 친구들을 따라 스위스의 맥주 양조장 투어를 다녀왔다. 3박 4일간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 맥주를 마시면서 다닌 것 같다. 독일 국경에서 가까운 St. Gallen에 있는 Kornhaus Bräu에서 다 같이 모였고, 취리히 근처 Winterthur에 있는 Chopfab(코프압이라 읽음, 촙밥아님 주의 ㅋㅋ)에 들렀다가 루체른에서 1박 후 다음 날 인터라켄에 있는 Rugenbräu를 방문, 마지막으로 Bossonens의 Boss Bier까지 총 4개의 양조장을 방문했다. 그중 하나는 면조 친구의 가족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셋째 날 낮동안 면조와 친구들이 그곳에서 페스트 비어를 양조하는 동안 나는 혼자서 로잔 시내를 구경했다.

 

각 브루어리에 대한 감상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생략하기로 한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내가 느낀 감상은 구지 적어놔 봤자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네 군데 각각 규모, 양조 방식, 설비, 철학, 마케팅 방식 등이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대충 연줄을 통해 양조장 투어를 할 수 있었던 덕분에 방문한 곳마다 브루마이스터가 직접 굉장히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고, 아낌없이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며 구석구석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투어 전-후에는 늘 맥주 테이스팅(을 빙자한 부어라 마셔라)을 하며 각자 일하는 곳에서 생산한 맥주를 교환하고, 친목도모를 했다. 개인적으로 비어 씬의 이런 문화가 되게 부럽다.

 

이렇게 인텐시브하게 독일어로만 소통하며 친구들과 여행을 한 것은 처음이다. 내 거지 같은 독일어를 다들 친절하게 집중해서 들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해줘서 고마웠다. 도저히 안 되겠을 때는 영어를 잘하는 R, V와 영어로 대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하루 종일 독일어를 듣고 말하는 3박 4일을 보냈다. 사실 첫날은 그 자체만으로 너무 피곤해서 루체른의 호스텔 방에서 씻고 눕자마자 어떻게 잠든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예전에 루체른시의 감옥이었던 곳을 호텔로 개조한 특이한 곳이었는데, 나 혼자 호스텔 방에 내버려두고 면조와 친구들이 밤거리 방황을 다녀오는 내내 감옥 방에 혼자 남겨져 있는 나를 걱정해 줬다고 한다. ㅋㅋㅋ 셋째 날 저녁쯤 되어서야 겨우 조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밤에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술도 더 마시고 당구치고 놀았다. 하지만 원래 인싸력이 부족한 나는 4일째에 집에 오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싶은 기분이었다.

 

감옥이었던 호텔에서 수감자의 기분으로 찍어보려 했는데 여고괴담이 생각나네

사실 에메랄드빛 호수에서 수영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안타깝게도 월간출혈 타이밍과 딱 겹쳐서 마지막 날에만 잠깐 강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다. 인터라켄에서 양조장 투어 후 갔던 호수가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물도 깨끗하고(사실 어딜 가나 독일 호수보단 다 아름답고 깨끗하다) 좋았는데 들어가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런데 물이 완전 얼음물처럼 차가웠으니 못 들어간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다음 날 갔던 Vevey의 호숫가는 마치 모네, 조르주 쇠라의 그림 속 풍경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사람들이 잔디밭에서 드러누워 칠링 하고 있는 곳이었다. 해 질 녘의 호숫가 잔디밭에 누워 윤슬과 호수 넘어 알프스 봉우리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물에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이미 좋았다. 수영복과 커다란 수건을 싸들고 와서 물에 들어갔다가 나와 햇빛에 몸을 말리고 다시 들어가고, 이런 자연이 지천에 널린 스위스 사람들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행운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심지어 전쟁도 안 겪고, 전 지구적으로 무슨 거지 같은 일이 일어나든 평화롭게 유유히 자연을 즐기며 살고 있는 모습이 많이 부럽고 약간 현타 왔다. 이런 곳에 살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같은 주제의 파랑새 같은 동화가 당연히 와닿을 수 있겠다.

 

물이 얼음장같던 인터라켄 산 속 꽤 높은 곳에 있는 호수
Vevey에서 갔던 호숫가 잔디밭
Bern에서 갔던 아레강. 저기 보이는 저 에메랄드빛 강에서 사람들이 몸을 던져 떠내려 가면서 논다. 유속이 너무 빨라서 나는 한 10미터 가다가 무서워서 포기했다.

혼자 갔던 로잔 시내 여행도 참 좋았다. 시내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있지는 않아서 가보고 싶던 곳을 모두 가보진 못했지만 예전에 ㄱㅅ이가 강추했던 올림픽 뮤지엄의 정원과 사진 미술관(이동 예정이라 현재 닫혀있음)의 정원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해질녘의 풍경을 특히 강추했는데 그건 못 봤지만 그 비슷한 풍경을 Vevey의 호숫가에서 본 것 같다. 코비드 동안 너무나 그리웠던 큰 도시의 현대 미술관도 드디어(!) 다녀올 수 있었다. 작품과 사람들이 채워질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 둔 크고 텅 빈 공간이 너무나 그리웠다. 로잔의 플랫폼 10은 그런 의미에서 2년간 꾹꾹 눌러 담아 온 그 욕구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었다. 아직 모든 건물이 다 지어지거나 오픈한 것은 아닌데 파인아트 쪽은 이미 운영 중이다. 오래간만에 아름다운 것을 잔뜩 보니 정말로 행복했다.

 

 

 

 

 

 

 

 

 

 

너무 좋다. 텅 빈 공간.
너무 좋다. 텅 빈 공간. 2

코비드로 인해 사람만나는 것 자체가 되게 불안하기만 했던 긴 긴 시간 이후에 백신을 맞고, 바이러스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조금 느슨해진 덕분에 이런 아름답고 에너지가 가득한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너무나 상냥했던 친구들 덕분에 여러 가지로 부담일 수밖에 없는 스위스 여행을 맘 푹 놓고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 새삼 외국어로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인텐시브 한 독일어 생활을 하고 있는 면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한국어로 떠들 때에 비해서 말수는 훨씬 적지만. 어차피 당분간 독일에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나도 좀 더 의지를 가지고 배워야지. (늘 마음만 이렇게 먹는다.) 아무튼 휴가 치고는 되게 빡센 일정에 피곤한 일도 많았지만, 덕분에 많은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 빨래와 집안일을 하며 좀 쉬긴 했지만 휴식이 좀 더 필요한 기분이다. 내일이 월요일이라니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