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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쉬면서 본 일드 세 작품 감상 - 고잉 마이 홈, 호타루의 빛,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나는 고등학생 때 일본 음악과 일본 드라마를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한 2-3년 정도 푹 빠져서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고는 더 이상 보지 않았었다. 그때 고쿠센이랑 트릭이 한창 방영하던 때였고, 좋아하는 배우나 작가를 따라서 더 오래된 작품도 많이 찾아봤었다. 그러고는 아주 오랫동안 몇몇 많이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는 봤지만(오센, 심야식당, 한자와 나오키,...) 도무지 일드를 보는 게 취미라고 말할 수는 없는 삶을 살았다. 끊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예상하기를 대학교에 가서 바빠졌고, 캐나다에 가게 되어 인터넷 스트리밍 등을 통해 동아시아의 컨텐츠를 보기 어려워져서 그런 것 같다. 대신 내 관심사는 영어권 나라의 컨텐츠로 옮겨갔었다. 캐나다에서는 한동안 호러, 미스터리, 좀비 영화들을 샅샅이 찾아봤었다. 그 관심사도 한 2년 정도 간 것 같다.

 

아무튼 요즘엔 왓챠를 구독중인 덕분에 다시 일드를 보기 쉬워져서 당기는 대로 하나씩 골라보고 있는데 너무 재밌었다. 언내추럴, 미우 404등을 쓴 노기 아키코 님의 극본이 너무너무 좋아서 하나씩 찾아보고, 이어서 거기 나오는 배우들의 다른 작품도 하나씩 확장해서 봤다. 그러다가 4일간 징검다리 휴가를 포함해 쉰 지난 주말에 두 작품을 시작하고 이미 보던 것까지 포함해서 세 작품을 끝냈다.

 

고잉 마이 홈은 이미 오래전부터 밥먹을 때나 쉬고 싶을 때 틀어놓고 보던 건데 이번 휴가를 통해 끝까지 다 봤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드라만데 너무 좋았다. 원래 이런 분위기의 작품, 특별할 것 없지만 은은하게 행복이 묻어나는 가족의 이야기가 편안하고 기쁨을 준다. 그런데 막 보고 싶다, 다음 편이 너무 궁금해, 하는 느낌은 없는 작품인지라 끝까지 다 보는 데엔 오래 걸렸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모에에게도 든든하고 친구 같은 엄마인 사에 캐릭터가 너무 좋았는데, 어딘지 초면이 아닌 듯한 그리운 기분이 들어서 누군지 찾아보니 야마구치 토모에란 배우였고, 내가 절대로 본 적 있는 롱 베케이션에 나온 여자 주인공이었다.

 

롱베케이션. 내용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립구나. 저 비주얼들.

호타루의 빛은 한 때 스틸컷이 짤로 많이 돌아다니는 것을 봐서 이미 알고 있던 작품이었다. 건어물녀란 말이 한 때 반짝 유행을 할까 말까 했던 것 같다. 건어물녀가 도대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는데 왜 그런 말이 따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을 만큼 보통의 사람이었다. 일 끝나고 집에 와서 누가 차려 입고 쉬냐. 저지든 스웨트 셔츠든 편한 거 입고 누워서 엉덩이 긁으면서 맥주 까마시는 게 왜 폄하받아야 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건어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난 건어물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건어물 안주만 빼면 딱 나였다. 남편은 내 설명을 듣더니 '회사 갈 때도 딱히 꾸미고 가지 않잖아'라고 해서 수긍할 뻔했는데, 내 나름대로는 단정하고 시크하게 꾸미고 가는 것이므로 무시하기로 했다. 아무튼 드라마 자체는 별로였고, 역시나 부장 역할의 남주 얼굴이 심상치 않아서 배우를 검색해 봤다가 20년 전 그분의 모습에 잠시 치였었다.

 

후지키 나오히토님...
당대의 이케멘...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무나 재미있게 본 교열걸 코노 에츠코는 이시하라 사토미님이 주인공이라 그것만 믿고 봤고, 너무나 큰 성은을 입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주인공 설정 덕분에 매 화마다 너무 귀엽고 시크하고 재미난 코노 에츠코의 ootd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미 얼굴도 재밌는데 패션도 재밌고 이야기도 정말 재미있었다. 오랫동안 특정 출판사의 패션잡지 에디터가 꿈이었던 주인공 코노가 일단 그 출판사의 교열팀에 뽑혀서 일하게 되면서 그 일을 통해 성장도 하고, 본인의 재능도 찾고, 일의 즐거움까지 만끽하며 천직임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그러면서 나로 하여금 꿈과 천직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나 또한 화려한 recognition을 세상에 남기는 작품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하게된일은 내 노력과 센스는 해당 프로젝트 담당자님 정도나 알아주는 산업의 챗바퀴를 도는 무수한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코노처럼 이 일을 통해 성장하고 몰랐던 재능도 발견하면서 수수한 나의 일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전사적 재택근무가 해제되고 다시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는 날이 오면 옷을 좀 더 멋지게 입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도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는 반드시 빡세게 차려입고 가는데, 그러면 자신감이 붙어서 일이 잘되는 것처럼 좀 더 일상의 나날을 꾸미는 노력은 모자란 활력을 채워주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오늘 팀원 J가 휴가를 가서 일을 대신해주면서 깨달았는데 늘 투덜대면서 땜빵하기 싫어했던 J의 일이 교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교열걸 코엣츠를 보고 난 뒤라 그런지 오늘은 proofreading이 덜 지루했다. 하지만 역시 모든 팀원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이 시기에 휴가를 3주나 가버린 J의 이기심은 지탄받아야 한다!

 

다음엔 뭘 볼까나. 갓토미님께 반한 김에 다른 작품도 더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