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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ing/From Design to UX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11년차,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3년차

퇴근 후 맥주 한 잔 하며 안락의자에 앉아있다. 때는 바야흐로 역병의 시대, 작년부터 쭉 재택근무만 하고 있다. 그리고 문득 벌써 디자인 일을 꽤 오래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헤아려보니 어느새 십 년이 넘어 있는 것이다. 와우. 물론 내 커리어는 커리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진창 뒤죽박죽이다. 디자인하다가 때려치우고 경영학 공부하고, 다시 도저히 경영학 전공을 살린 일은 하기 싫어서 디자인 필드로 돌아왔다. 대신 한창 인기가 좋은 UX필드로 살짝 방향을 틀어 전직했다. 현재는 독일의 클라우드 회사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도 타이틀은 UX 디자이너긴 하지만 경영학에서 배운 지식도 써먹을 겸 프로덕트와 서비스 기획도 하니까 스스로를 프로덕 디자이너로 칭하고 있다. 놀랍게도 회사에선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사실 디자인 드리븐 혁신엔 관심 없는 회사 같기도 하다.

 

재미 삼아 회고 삼아 지난 11년간의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써내려 가볼까 한다.

 

따분함 주의


Retrospect

디자인 외주 아르바이트의 연장선

2010년에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과를 졸업한 학부생으로서 프리랜싱을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과제비와 용돈을 벌고자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는데, 그중에서 전공을 살려서 하던 웹사이트 만들기나 편집디자인일이 계속해서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초짜 티가 나는 작업물들이었지만 가격이 쌌고, 완성은 시켜주니까 한 번 이용해본 분들이 여기저기 소개도 해주고 계속해서 일이 들어왔다. 수입이 일정치 않고 많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좋은 시절이었다. 작은 작업실을 임대해서 무악재 고개를 넘어 숙대입구까지 자전거를 타고 매연을 마시며 출퇴근을 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배고플 때 밥 먹고, 일하고 싶은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자유가 좋았다. 파견으로 이 회사 저 회사 다니며 단기로 일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회사마다 천차만별의 문화와 시스템을 구경하는 재미가 가장 컸다. 일 년 반쯤 이런 생활을 하다가 주변의 잔소리에 지쳐서 취직을 하기로 결심했다.

 

웹에이전시에서 홈페이지 죽어라 깎던 시절

2011년 가을이 시작될 무렵 취업을 했다. 사실 처음 이력서를 보낸 웹에이전시에서 면접을 보자고 했고, 바로 채용이 되어버렸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사실 그동안 하던 파견근무와 크게 다른 느낌을 받지 않았다. 단지 계약이 좀 더 장기이고 프로젝트당이 아닌 매월 지급을 받는다는 것. 처음 들어간 회사는 생각보다 되게 작았고(직원이 나까지 넷, 나올 땐 일곱), 아뿔싸 속았다 싶은 느낌이었는데 일단 파견 알바랑 비슷하다는 식으로 가볍게 마음먹은 김에 다녀보기로 했다. 그래서 초반에 팀장님이 제안한 회식도 다 약속 있다고 거절하고 사회 초년생답지 않은 막무가내적인 모습을 보여버렸다. 그런데 결국 이 회사에서는 총 3년을 약간 넘겨 일했다. 퇴사할 때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게 싫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사수였던 대리님이 모델 같은 외모와는 정 반대로 푼수라 너무 재밌었고,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서 많이 배웠다. 게다가 초반에 캐릭터를 나 편한 대로 잡고 다닌 덕에 오래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한 달에 적게는 서너 개에서 많게는 열개까지 다양한 웹사이트 제작/마케팅 프로젝트를 바쁘게 쳐냈다. 다양한 산업분야의 고객들을 만나며 파견 아르바이트할 때보다 더 넓은 분야를 구경 다니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자꾸 바꾸고 자기주장을 우겨대는 클라이언트도 많아서 고생도 했지만 내게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기분 나빠하지 않게 다루는 커뮤니케이션 재능이 있다는 것도 이 일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월급이 너무 짜서 관뒀다.

 

행복하고 알찼던 퇴사 생활

2014년 가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일 년 정도 프리랜싱을 계속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월급만으론 내 씀씀이가 감당이 안되어서 외주를 계속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때 방송대학교 다니면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석사는 외국에서 하고 싶었기에 IELTS도 보고 퇴사해서 행복하지만 바쁘게 보냈다.

 

내가 대표이던 시절

2015년에는 남편도 회사를 그만두고 비디오와 웹사이트 제작을 하는 스튜디오를 하나 만들었다. 말이 스튜디오지 그냥 침실 옆 작업실에서 받은 외주 일을 각자 하는 일이 전부였다. 다만 일반사업자를 내고 세금이나 회계에 대해 공부하면서 때려치우고 싶던 경영학 공부가 조금 의미 있어졌다. 브로셔 만들어서 의료기기 박람회에 가서 회사 홍보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해볼까 싶기도 하다가 방송대 졸업도 가까워 오고, 슬슬 석사 지원을 했다. 지원은 총 두 곳에 했는데 한 곳은 떨어졌고, 다른 한 곳에선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냥 떨어졌나 보다 싶어서 좌절했고 아무래도 내가 현지에 가본 적도 없고 너무 정보를 몰라서 떨어진 것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전세 계약도 끝나고 올려줄 돈도 없는 타이밍에 일단 베를린으로 가서 다음 인생을 계획하려고 무작정 에어비엔비를 예약하고 비행기표와 기차표를 샀다. 고양이 둘도 다 같이 가야 해서 되게 크고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그땐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독일 유학

2016년 8월, 살던 전셋집에서 짐을 빼고 시가와 우리 본가를 전전하며 출국날짜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출국 이틀 전 새벽에 전화가 왔다. 국제전화였다. 지원했던 또 다른 대학교에서 온 것이었다. '안녕 ㅁㅁ대학 ㅇㅇ과인데, 너 지원한 ㅊㅊㅊ맞지? 네 자리 하나 남았는데, 어때, 올래?' 하는 되게 격식 없는 말투였다. '진심? 아...(그럼 베를린은 어쩌지? 베를린에서 외국만큼 멀리 떨어진 학굔데, 예약해둔 숙소는? 돈 날리나? 기차표도 날려야 하나? 젠장 돈 아까워)... 그래 갈게!' 그렇게 독일의 중서부 시골에 있는 대학원에서 2016년 9월에 시작하는 학기에 등록하게 되었다. 사실 난 이때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어서 경영학과 졸업장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자격미달인 경우인데, 그래서 예비합격생 정도의 신분이었다가 뒤늦게 연락을 받은 것 같다. 지금은 학부도 졸업을 해서 석사학위와 더불어 총 두 개의 학사학위를 갖게 되었다.

 

2016년 9월부터 2019년 2월까지 대학원을 다녔다. 솔직히 학부도 편입으로 들어가서 수업을 전부 듣지 않은 상태로 졸업도 안 하고(!) 어찌어찌 대학원 과정을 시작한 터라 공부가 어려웠다. 게다가 외국어였으니. 프로그램 디자인은 총 3학기 만에 졸업 가능한 스케줄이었지만 도저히 논문과 수업을 병행하기는 힘들어서 4학기에 끝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2018년 1월부터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의 구인광고를 보고 워킹 스튜던트로 지원해서 파트타임 일을 시작했는데, 그게 너무 멀고 힘에 부쳐서 결국은 총 5학기에 걸쳐 논문까지 다 쓸 수 있었다. 워킹 스튜던트란 제도 덕분에 UX타이틀을 달고 이직할 수 있었다. 사실 웹디자인을 하면서 웹앱이나 UI/인터랙션 디자인, 모바일 퍼스트 어프로칭을 이미 해봤기 때문에 스무스한 전직이 가능했다. 파트타임 학생에게는 또 보다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할 기회를 많이 줘서 닐슨 노먼 그룹의 러닝 자료나 회사 자체에서 제공하는 UX수업을 들으며 바로바로 적용하고 실험해 볼 수 있었다.

 

UX 디자이너로 입사해서 프로덕트 디자인을 하는 오늘까지

2019년 3월부터는 워킹 스튜던트에서 풀타임으로 전환해서 쭉 같은 회사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일과 조직에 적응을 좀 해서 실험적인 프로젝트나 리서치는 거의 안 하고 있고(해도 쓸모가 덜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대신 서비스 기획과 디자인을 다듬어 나가고 디자인 시스템을 에셋화 하는데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같은 콘퍼런스나 써밋 시즌에는 익스플레이너 같은 비디오도 많이 만든다. 솔직히 커리어 시작부터 지금까지 온갖 잡다한 재주들을 다 써먹으면서 일하게 된다. 사진 찍고 일러스트 그리는 것만 제외하고는 다 하는 것 같다.


참으로 길고, 그런데 특별한 교훈도 없는 이야기다. 내가 직접 살아온 길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 나와의 싸움에선 진 적이 더 많았다. 완성만 하자, 늦지만 말자, 나와 내가 속한 회사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수준으로만 하자, 금전적 손해만 보지 말자 싶은 마음들과 함께 주먹구구로 살아왔다. 그래서 사실은 같은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 의욕 있고 커리어 패스도 잘 기획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다.

 

그런데 뭐 나와의 싸움에서 이긴 쪽도 나니까 (feat. 위에 저 분. 이름 까먹음)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 없다. 지금 있는 팀에서 더 진행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몇 개 더 남아있다. 내가 담당하는 프로덕트가 환골탈태할 때까지 하나씩 바꿔나가는 재미로 다닐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일을 찾아볼 생각이다. 다른 팀도 좋고, 다른 회사도 좋다. IT업계 치고 좀 느긋한 듯한 회사지만 그래도 역시 4차 산업혁명의 큰 테마 중 하나인 클라우드 비즈니스를 영리하게 하고 있는 회사다. 하지만 다른 회사에 지원하게 된다면 B2C회사로 가고 싶다. 아무래도 기업용 소프트웨어는 눈이 즐겁지가 않아서 디자인이 덜 재미있다. 가고 싶은 업계는 아직 모르겠다. 희망은 오토모빌이나 항공기, 게임 UX에 관심이 있는데 내가 할 역량이 될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