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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아픔의 냄새가 빠지고

동료들이 선물해준 동백꽃나무를 발코니에 놔뒀다.

아픔에는 냄새가 있다. 모든 아픔마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이 가져오는 냄새가 있다. 내 경우는 감기가 걸릴 것 같으면 코 안쪽 깊숙한 곳에서 평소와 다른 냄새가 감지된다. 그걸 나는 멋대로 감기 냄새라고 불렀다. 엄마의 병에도 냄새가 있었다. 엄마의 경우는 감기 냄새처럼 구체적인 병의 냄새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감기 냄새는 당사자인 나만 맡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엄마도 뭔가를 맡으셨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으로서 맡을 수 있는 냄새는 아니었다. 그보다 오랜 병환과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던 엄마가 병으로 사회활동이 제한됨에 따라 하나씩 생기는 냄새가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고, 한 때는 부끄럽기도 했던 냄새는 지층 집의 곰팡이 냄새였다.

 

살던 동네가 재개발을 하게 되어 전셋집을 전전했었는데, 집에 환자가 있다 보니, 이동이 편한 1층 집만을 구했었다. 직전 살던 집이 주차장이 없어 불편하기도 했고 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시고 큰 고민 없이 결정해 버리셨다고 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집의 위치와 주차장이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점이 별로이고 심지어 비싼 집이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채광과 환기가 용이하지 않은 반지하 구조의 지층 집이었다. 밖에 있다가 돌아와서 집 문을 여는 순간 살짝 퀴퀴한 냄새가 난다. 가뜩이나 환자가 집에 있는데 더 우울해지고 걱정이 되는 냄새였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부유한 역할의 이선균이 가난의 냄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장면에서 난 우리 집에서 맡았던 그 냄새를 떠올렸다. 드디어 올해가 지나면 재개발이 완료되어 입주를 시작한다니, 아빠와 남동생이 6여 년에 걸친 이 지긋지긋한 냄새와 작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빠가 차마 손대지 못하겠다고 내개 부탁한 엄마의 옷장 정리를 했다. 아프기 전에 사회생활을 활발히 하셨던 엄마의 컬렉션이 제법 좋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다. 국내 의류 브랜드들 것인데 소재가 좋고 클래식한 디자인의 정장이 많았다. 실내복 말고는 옷이 별로 필요 없는 나지만 몇 벌 정도는 욕심이 났다. 솔직히 그냥 기부함에 넣어버리기 아깝기도 했다. 순모 코트 세 벌과 정장 재킷 둘, 한복 두루마기, 그리고 블라우스 두 벌을 챙겼다. 엄마가 나보다 체형이 크셨어서 두 치수씩은 줄여야 했다. 일단 세탁을 맡기러 갔다. 처음에는 '옷 관리를 어떻게 하셨어요? 습 냄새가 심하네요'라고 살짝 불쾌감을 표하시던 세탁소 사장님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바로 이해한다는 얼굴을 하시며 본인 아버지도 같은 경우셨다고, 세탁 이후에도 2-3일 정도는 통풍과 환기가 잘 되는 곳이나 건조한 날에 밖에 걸어놔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최대한 냄새 제거에도 신경 써서 세탁을 요청하겠다고 하셨다. 과연 클리닝 후에도 냄새는 조금 나아진 정도였고, 다행히 색이 바랜 자국이나 얼룩들은 거의 사라졌다. 바로 집 근처에 있는 수선집을 발견해서 다 들고 가서 그 자리에서 핀으로 줄여야 할 정도를 집어놓고 어깨를 기준으로 한 치수씩 줄이기로 했다. 일감이 많아서 좀 오래 걸린다고 하셔서 2주 후의 귀국 날짜에 맞추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한국에서 '오래 걸린다'는 기준은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정도면 된다는 것이었다.

 

독일에 돌아와서 이틀정도 낮에만 옷들을 발코니에 걸어놨지만 냄새는 빠질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신뢰하는 세탁소 운영자분의 유튜브 채널로 들어가서 이런 경우를 검색해보니 드라이클리닝으론 습기로 인해 생긴 냄새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고, 울제품도 물빨래를 해야 한다고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한 벌씩 조심스럽게 물빨래를 두 차례씩 했다. 대략 일주일에 걸쳐서 모든 세탁이 끝났다. 그동안 비가 안 오는 때에 뛰쳐나가서 발코니에서 옷에 바람을 쐬어줬다. 10분 단위로 날씨가 바뀌는 독일의 봄이기 때문에 계속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젠 모든 옷들에서 기분좋은 냄새가 난다. 물빨래와 섬유유연제, 그리고 가끔씩 해가 비치던 발코니 덕분이다. 동네 수선집 사장님의 솜씨가 괜찮았는지 한치수만 줄였지만 나에게 제법 잘 어울린다. 그래도 역시 오래된 옷이라 디자인은 좀 생소하고 소매 끝이 살짝 닳아있다. 하지만 마침 레트로 한 디자인이 다시 선호받는다고도 하니까, 앞으로 몇 년간 잘 입을 것이다.

 

엄마옷 물려입기라는 작은 프로젝트를 통해 여러 가지를 배우고 체험했다.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이다. 난 아마 앞으로도 건강할 때의 엄마처럼 정장을 갖춰 입고 활기차게 사람들을 대하는 그런 일은 아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내 눈에 가장 멋있게 보였던 그때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내가 소유할 수 있을까 싶어서 옷장 비우기가 필요한 와중에도 이 옷들을 가져왔다. 아픔의 냄새가 이제 빠지고, 멋진 그 모습을 최선을 다해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