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Journal

우리아빠

경포대에서 아빠랑 나

아빠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나와 동생은 엄마를 잃었지만 아빠는 삼십 년을 넘게 함께한 삶의 파트너를 잃으셨다. 그 슬픔을 나는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아빠는 마지막까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셨다. 주변에 우리 사정을 아는 모두가 우러러보았고, 엄마의 엄마와 자매들 모두 아빠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만을 표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족으로서 나눠져야 할 짐이 있었을 텐데도 외국에 나가 살고 있기 때문에, 학업 때문에, 직장일이 바쁘기 때문에 등 여러 가지 핑계로 무거운 짐을 아빠에게만 들게 했다는 죄책감이 있다. 여러 사람 몫의 짐을 내팽개치긴커녕 겸허하게 받아들이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기를 격려하시면서도 엄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아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크다. 2015년에 진단을 받으셨으니 6년간 간병인, 보호자로서 사셨다. 굉장히 긴 시간이다. 하지만 아빠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던 때를 떠올리면서도 '그래도 (엄마가 곁에 계시던) 그때가 좋았지'라고 중얼거리신다.

사실 어릴 때는 나보다 남동생을 대놓고 예뻐하셨어서 불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에게 잘해주시는 것에 비할 수 없이 더 엄마에게 잘해주신 지난 6년간의 모습을 기억한다. 나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부터 로열티와 희생의 모습을 배웠다는 점에서 이보다 큰 행운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친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근거를 빼곡히 가진 내 삶이 가치 있게 느껴진다. 아빠와 엄마에게 감사하다.

 

격리가 끝나고 나서, 한국에 있는 동안 최대한 아빠와 동생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아빠가 일을 쉬시는 2월 동안 엄마에게도 두 번 다녀오고, 영화도 한 번 다 같이 보고, 강릉으로 1박 2일 여행도 다녀왔다. 그리고 오후부터 자정까지는 독일시간에 맞춰 일을 하며 일정을 따라가느라 계속 피로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아빠랑 오랫동안 붙어 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주 어릴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늘 맞벌이를 하셨었기 때문에 난 주로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보너스로 어른이 된 남동생과도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어서 좋다. 혈육이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 떨어져 산 시간이 긴 만큼 각자 변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롭고, 예전엔 이랬지 하면서 함께 공유하는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다.

 

어제는 회사에서 일보다 집안일도 좀 하고 가족과 환경을 돌보라는 의미에서 느슨하게 일하는 '피플스 데이'라는 행사를 했다. 겸사겸사 저녁식사를 내가 요리해서 준비했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는 한국에 내 집과 살림이 없다 보니 요리를 한 적이 없었다. 당근과 양파가 엄청 커서 서먹했다. 독일에서 해 먹던 방식으로 채소 짜장 덮밥을 만들었는데 다들 엄청 맛있게 잘 먹어서 뿌듯했다. 한국 채소가 독일 채소보다 단맛이 좀 더 두드러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은 점심으로 다 같이 먹으려고 닭 한 마리 곰탕을 끓였는데 이 것도 맛있었다. 두 번의 성공으로 요리를 잘한다고 인정받은 것 같다. 왜 좀 더 일찍 이런 시간을 엄마와도 갖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도 된다. 엄마가 아파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실 때는 맛있는 것을 사 먹거나 해 먹는 것이 미안해서 더 대충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빠가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우리랑 더 많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한국에 자주 오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