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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엄마의 말뚝(을 읽기 전에)

아빠가 추천한 알릴레오라는 프로그램을 유투브에서 몇 개 봤다. 책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인상 깊었던 내용을 언급하면서 토론하는 구성이어서 내가 굳이 그 책의 독자가 아니어도 보는 재미가 더 있길래 몇 편 골라봤다. 그중에 박완서 작가의 엄마의 말뚝을 두 편에 걸쳐서 다룬 것을 보고 어제와 그제 한 편씩 봤다.

 

박완서 작가님이 타계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방송국 채널에서 유투브에 오래전 인터뷰나 티비 출연 방송분을 편집해서 올렸길래 몇 개 재미있게 보기도 했다. 엄마의 말뚝이 자전적인 소설이고 개성 근처에서 서울로 굳이 나와서 딸을 교육시켰던 이상하고 대단한 엄마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했는데 알릴레오에서 다룬 것을 보고 당장 결제해서 전자책으로 다운로드하였다.

 

토론 중에 들은 인상으로는 엄마의 말뚝에서 그려지는 엄마의 모습은 우리 엄마와 비슷하게도 느껴졌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어머니에게서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하는 문학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성향이 비슷했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확 깨인 사람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삶의 여러 가지 가치관과 태도에 있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볼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짧고 굵게 살다 가셨다. 여자 희 맑을 숙자를 쓰는 우리 엄마는 63년 8개월 5일을 살다 가셨다.

 

엄마 덕분에 나는 교육을 많이 받았다. 집이 엄청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니 금전적으로 미처 뒷바라지가 안 되는 부분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양육자가 자식의 교육을 어느 정도까지는 시켜야 한다는 그 기준점은 높았다고 생각한다. 집 근처인 홍대 앞에서 미대 입시를 했지만 무조건 서울대를 보내려고 하셨고(서울시내에서 미대가 쓸만한 대학은 서울대뿐이라고 믿으셨었다), 그에 대한 지원을 해주셨었다. 그 이전에도 어릴 때부터 영어 과외라든지 점수가 떨어지는 과목을 위한 사교육도 다 시켜주셨었다. 특별히 좋다고 보기는 힘든 학군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주변 친구들의 경우에 비해 우리 엄마의 교육열은 특별해 보였다.

 

엄마의 말뚝에서 엄마는 본인이 미처 살지 못했던 삶을, 연장된 자아로서의 딸을 통해 살아보고 싶으셨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토론 진행자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좋고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지만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양육자가 고리타분한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어서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던 우리 엄마였다. 자라면서 나는 엄마처럼 머리가 좋진 않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엄마는 셈이 빠르고 암산도 3-4자리까지 척척 하셨고, 사업도 여러 개 일구시고 유지하셨었다. 진행성 핵상 마비라는 잔인한 뇌질환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으셨다.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능력은 많이 쇠퇴했었지만 오히려 전화번호나 중요한 날짜들은 여전히 잘 기억하고 계셨다. 나도 소속된 대부분의 곳들에서 머리가 좋다는 말은 듣고 살았지만 엄마처럼 두드러지는 특기는 없다. 공부도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욕심이 너무 없다고 서운해하셨다. 서울대도 결국 못 갔다. 우리 엄마가 내 입장이었다면 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엄마의 연장된 자아로서의 나는 조금 실망스러운 '다른' 인생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엄마가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시험문제를 잘 푸는 대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았고, 그래서 낯선 외국에서도 잘 살아가고 있다. 엄마와 나는 결국 다른 사람이기에 우리 관계가 재미있었음을 엄마가 결국엔 아셨을 것이다.

 

소설에도 가족을 위한 엄마의 억척스러운 희생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엄마의 억척스러움 또한 남부럽지 않았다. 그것은 가족,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책임감이었겠지. 그리고 우리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게 보상일 테니까.

 

토론 진행자가 던진 질문 중 '엄마의 말뚝은 무엇이었을까'를 나도 우리 엄마에게 투영해 생각해본다. 가족 아니면 종교였을 것이다. 가족 중에서도 아픈 손가락이었던 남동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딸인 나에게는 인생을 건 말뚝과 같은 지위는 주지 않으셨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말뚝에 묶여 자유를 잃은 본인의 현재의 삶이 아닌, 똑똑하고 능력 있어서 훨훨 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나에게 기대하셨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한국인이 딸이 쓴 소설을 통해 언어적 표현 이면의 것까지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임경선 님의 에세이 '다정한 구원'과 정세랑 님의 소설 '목소리를 드릴게요'. 모두 위로와 공감이 되었다. 이제 엄마의 말뚝을 읽기 시작해야지. 그리고 박완서 님의 다른 안 읽어본 작품들도 하나씩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