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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옥상 구경하기

눈이 온다. 지금 있는 곳은 높은 층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망이 좋다. 큰 창으로 날씨와 시각의 변화를 바로 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다. 서북향이어서 해질녘 따뜻한 햇빛이 저녁까지 머문다. 강 넘어 바라보는 노을도 근사하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점은 여러 건물들의 옥상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를 다 보낸 오래 살았던 엄마아빠의 첫 아파트는 15층에 있었다. 바로 위에는 옥상이었다. 당시에는 옥상 문을 잠궈두지 않아서 옥상을 통해서 옆 동의 친구집에 간편하게 놀러 갈 수도 있었다. 난 옥상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국의 장녀답게 집에서 가장 작은 현관옆 방이 내 방이었는데, 넓은 옥상에는 늘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자유로웠다. 그래서 난 옥상이 정말 좋다. 면조랑 사귀게 되었을 때 좋았던 부분 중에 면조가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는 점도 있었다. 옥탑방은 아무래도 살기에 불편하겠지만 대신 자유가 조금 더 많이 주어진다. 집 외부에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다. 밖에서 머리도 깎고, 친구들이랑 작은 바베큐도 해 먹었었다. 비싸고 복잡한 서울에서 옥상이 선물하는 공간은 보너스처럼 달콤하다. 물론 그렇다고 싼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내가 집을 가지게 되면 꼭 옥상이 있는 집을 가질 것이다. 전통 방식으로 기울어진 지붕보단 역시 옥상을 가지고 싶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옥상의 모습도 재밌다. 장독대가 조로록 놓인 건물도 있고, 작은 텃밭을 일군 흔적으로 보이는 곳도 있다. 장독대가 있는 옥상엔 화분도 엄청 많이 놓여있다. 겨울이라 푸릇푸릇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빨래 건조를 위한 공간이 있는 곳은 주상복합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초록망을 쳐서 작은 골프장을 꾸며둔 곳도 있다. 망 안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진 않지만. 그냥 근사하게 마감만 잘 해둔 텅 빈 공간도 있다. 날이 좋을 때는 루프탑 등의 용도로 쓰이는 상가건물이려나. 사무실들이 들어선 상가건물 위에는 초록 방수페인트와 실외기들이 주루룩 늘어서있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벌써 서너명정도 올라와서 담배피고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직장인들이 한 숨 돌리며 쉬어가는 공간인 것이다. 재즈바가 있는 건물에는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가 접혀서 쌓여진채로 눈을 맞고 있다. 옥상의 공간들이 저마다 알뜰히 쓰이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고 뿌듯한 마음도 든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서울의 항공사진을 본 적 있는데 초록색 방수페인트가 칠해진 옥상들이 강력한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했던 아파트의 옥상에도 초록색 방수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해서 이 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초록색 방수페인트와 옥상에 놓인 메탈릭한 각종 구조물들이 은근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름은 모르는데 이발소에 있는 돌아가는 등같은 왕관 모양의 풍속계 같은것이 여러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양과 옥상 바닥과의 색대비가 그저 좋아서 사진을 많이 찍었었다. 용도와 이름을 알아볼 생각을 안했는데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내 옥상이 생기면 초록색 페인트를 칠할지는 잘 모르겠다. 방수페인트를 칠하긴 칠해야겠지. 아르헨티나처럼 하늘색으로 칠하는건 어떨까. 어차피 계속 덧칠을 해줘야 할테니까 때타는건 신경 안쓰인다. 마감은 나무데크로 해도 좋을 것 같다. 에어콘 실외기는 절대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 양철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옥상위의 옥상도 꼭 있었으면 좋겠다. 상상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네. 지루한 격리중 오전 시간을 이런식으로 공상하며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