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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ing/From Design to UX

From Design to UX

움직이는 관심사

그동안 이 카테고리에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핑계가 있었지만 가장 지배적이었던 이유는 내가 충분한 전문가일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 의심의 근거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근거는 역시 나의 '움직이는 관심사'이다. 나는 아무리 증거를 찾아보려고 해도 뭔가에 대해 한 우물을 깊고 깊게 판 적이 없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에 넓고 얕은 관심을 두며 조금씩 파내려 가다가 가끔 운이 좋게 각 각의 영역에서 얻은 지식이 도움을 주고받게 되었다. 내가 전문적인 영역을 공부할 생각이 들 만큼 깊은 관심이 있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실 꽤 다양한 디자인 분야는 거의 내 삶의 축이었다. - 학창 시절에는 만화 작화와 스토리 쓰기, 더 어릴 때부터 은근히 화가인 큰엄마처럼 살고 싶었기에 가져온 순수미술에 대한 관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구 시각디자인) 전공에 진학해서 배운 수많은 아름다운 그래픽 디자인 작품들, 폰트와 타이포그래피, 영상디자인 특히 영화를 통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졸업 후 프리랜서 할 때 북디자인 등을 통해 접한 건축디자인, 한동안 직업이었고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인 웹/인터페이스 디자인에 이어 현재 사용자 경험 디자인까지, 늘 이 분야의 책을 읽고,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 그러다가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비즈니스 디시전 메이킹 등에 대해 영향력을 더 가지고 싶어 졌고, 그래서 썩 흥미가 당기지는 않지만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영학을 방통대에 편입해서 배운 후 독일에 와서 석사를 경영학으로 했다. 석사 내내 창업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HRM정도에만 관심을 가져왔고, 졸업 논문도 맥주 양조장 창업과 경영에 대한 내용으로 쓰며 부전공이 맥주인가 하는 농담을 해 왔다.(남편이 현재 맥주 양조를 전공 중이고 이에 대한 토론을 많이 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주 알못은 아니다.) 지금은 쳇바퀴 돌 듯 회사와 집을 오가는 생활 속에 그나마 나의 현재 직업이고, 시스템 안에서 배운 적은 없는 사용자 경험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려는 발버둥을 치고 있다.

 

내가 잘 하는 것

어제 트위터에 일하면서 느낀 점을 넋두리처럼 쓰다가 우스갯소리로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을 위한 경영진 설득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책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마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나 보다. 나는 하나만 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러 개를 다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는다. 나는 디자이너다. 디자인을 가장 오래 했고, 잘 하지만 경영진-개발자 사이의 소통 역할을 해서 일을 원활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것을 잘하는 디자이너다. 저 소통 역할은 어디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에 추가로 다른 사람이 잘할 때, 못 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겪어보고 나에 맞게 수정해서 체득한 능력이다. 나에게 좋은 리더십이 있는지는 딱히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내가 좋은 리더가 된다면 그건 이 한쪽의 니즈의 핵심을 파악하고, 다른 한쪽이 알아듣게 시각화/언어화해서 전달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이 큰 힘이 될 것이다. 돈 노먼 교수님이 그랬다. 본인은 누군가가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 그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결하고 싶은 문제 너머를 고민해보고 진짜 해결해야 할 것이 따로 있는지를 파악해서 고집스럽게 그걸 바꾸자고 설득하는 것이 진짜 어려운 일이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사실 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문제를 해결할 테크닉은 그때 그때 팀과 함께 머리 굴리면 떠오르고, 떠오른 것을 배워서 적용만 하면 된다.

 

내가 못 하는 것

구지 내가 못하는 것을 광고할 필요는 없지만 위의 '내가 잘하는 것' 제목을 써놓고 보니 계속 내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내 전문분야 안에서,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역시 로고 디자인, 심벌 디자인, 그래픽 엘리먼트, 패턴 디자인이다. 그래서 슬금슬금 피하다 보니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인이라는 명목으로 가장 많은 부탁을 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포스터 디자인도 하기 싫다. (졸업전시 포스터를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어서 144개쯤 시안을 만들고 리젝 당한 경험 이후로 더 이상 포스터 작업은 한 적이 없다.) 이쯤 되면 '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픽 디자인 기본을 가져야 잘할 수 있는 편집 디자인, 모션 그래픽 등 콘텍스트가 좀 볼륨 있게 존재하는 순간 흥미가 돌기 시작한다. 직관성의 미덕이 인정받는 지점부터가 나의 관심사이고, 그래서 많이 해 보았고, 그래서 잘한다. 시각적인 형상 안에 추상성을 버무려야 하는 작업, 즉 단순화한 형태에 온갖 철학적인 생각의 전개를 통해 형이상학적인 의미 부여를 해야만 하는 작업은 도저히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것을 잘하는, 가령 폴란드 같은 사람은 나에게 있어 약간 성직자처럼 느껴진다. 나는 평신도로서 디자인의 은총만 받고 살고 싶다.

 

앞으로 쓰고 싶은 것

부담 없이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길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쓰는 넋두리 인 것 같다. 지금 글처럼 큰 주제, 작은 주제를 가지고 써보려고 한다. 읽어줬으면 하는 대상은 같은 일을 하는 그래픽/웹/인터페이스/프로덕트/사용자 경험 디자이너, 디자이너와 일하는 사람, 디자이너와 일을 시작하고 싶은 시람. 디자이너로서 막 시작한 사람,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사람, 그냥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사람, 그리고 미래의 나 자신이다. 정보를 주거나 도움이 되면 더 좋겠지만 일단 재미가 있거나 공감이 되거나 댓글을 쓰고 싶어 지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아깝게 시간을 내서 머리를 짜내어 쓴 글이 불쌍하니까. 아무튼 너무 회사 넋두리만 하지는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이를 계기로 나 스스로 공부도 좀 더 했으면 좋겠지만 크게 바라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청개구리적 자아가 무섭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