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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럽게

창문에 눈송이 그렸어. 창틀에는 수경 번식중인 접란과 비슷한 사이즈의 파슬리 뭉치

스스로에게 아침을 정성스럽게 차려주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어제 퇴근 후 집에 와서 너무 배가 고파서 밥을 먼저 먹었다. 사실은 일요일 저녁에 반찬을 만들어 뒀었는데 그게 너무 맛있어서 밥을 지어서 먹을 생각이었지만 밥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만큼 배가 고팠다. 그래서 그냥 토요일에 만들어 먹고 남은 라자냐를 전자레인지에 덥혀 먹었다. 배가 많이 고팠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애초에 나에겐 너무 적은 1인분이었는지 배가 별로 차지 않았다. 그런데 운동도 스킵하고 밥부터 먹은 만큼 배가 부를 만큼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설거지 및 주방정리, 청소기 돌리기, 고양이들 챙기기를 다 완수하고 나니 소화가 약간 된 느낌이라 운동을 하기로 했다. 격한 운동이 하기 싫을 만큼 졸리고 피곤한 날이었어서 대신 30분에 걸쳐 스트레칭을 꼼꼼히 정성스럽게 했다. 사실 이렇게 길게 스트레칭만 집중해서 한 것은 또 처음이다. 정말 좋았다. 소화도 더 빨리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잠잘 때쯤에는 배가 고팠다. 배가 고파서 잠이 쉽게 들지 않았지만 내일 아침에 새로 밥 지어서 맛있는 아침 차려줄게 어서 자라-라고 달래면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가까스로 일찍 일어나서 쌀을 씻어 밥을 올려놓고 약불에 된장국 위한 채수도 우리면서 기다리는 40분간 책도 읽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 끼니를 대충 때우거나 지나치기가 되게 쉽다. 아무래도 제대로 차려먹으면 설거지거리도 나오고,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요리나 조리를 다 끝내고 밥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참을 수 있는 딱 맞는 배고픔 타이밍에 식사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아침밥은 회사생활을 하는 오랫동안 안먹는 경우가 많았어서 아침에 내가 배고플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배가 고프더라도 아침의 배고픔은 말 그대로 허기짐이라서 뭐라도 일단 쑤셔 넣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과일을 집에 챙겨두지만 이 것도 잘 손이 안 간다. 과일은 (귤, 복숭아 등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의식적으로 챙겨 먹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그냥 출근을 해서 커피 한두 잔 마시고 일하다가 점심 먹으러 약간 일찍 가서 잔뜩 먹는 1일 2식 생활을 꽤 오래 해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따뜻한 아침밥을 챙겨 준 적이 별로 없다. 남이 차려주는 것과는 또 다르다. 내가 차릴 때는 정말로 배가 고파서 내가 먹고 싶은 것들로 구성해서 차려먹는 거니까 사실은 더 감동적이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중국풍 소스로 볶은 가지와 배추, 야채스톡으로 간을 한 감자랑 당근채 볶음, 김치, 두부 미역 표고가 들어간 미소된장국, 그리고 흑미 쌀밥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식탁 앞 소파에서 자고 있는 노르망디를 보며 천천히 잘 먹고 커피도 특별히 더 정성스럽게 물줄기를 흘려서 내려 먹었다. 일은 내가 했지만 귀한 대접받은 것 같고 기분이 좋다.

 

오늘은 재택근무 하기로 통보하고 와서 아침에 좀 여유가 있다. 이제 출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