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조가 분당으로 이사간 뒤로 정말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KBS파업의 여파로 추가 작업도 많이 나오는데다 아무래도 위쪽에서 일처리가 어수선한지 스케쥴도 엉망이다.
늘 나의 주위를 위성처럼 맴돌던 면조가 사라지니 어쩐지 주변이 고요해진 기분이다.
토요일은 우리가 유일하게 하루종일 만날 수 있는 날인데 요즘엔 주로 결혼관련 볼일을 같이 보러 다닌다.
오늘도 명동성당의 혼배미사가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서류도 제출할 겸 답사하러 다녀왔다.
이번주에 운동을 두번밖에 못가서 오늘은 꼭 운동갔다 명동에 가려고 했는데 늦잠에 수다에 빈둥대느라
시계보고 깜짝놀라서 부리나케 나가서 40분 정도만 런닝하고 씻고 출발-
면조가 녹번에 살 때는 늘 목적지까지 같이 출발해서 갔는데 이젠 목적지에서 만나니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일어나서 빈둥대고 정신없다보니 바나나 하나만 먹은 상태라 배가 미친듯이 고팠다.
명동거리의 수많은 군것질거리들이 유혹했지만 혼자먹으면 삐질테니까 그냥 갔다.
이리 저리 분위기를 보고, 신부대기실이며 주차장이며 눈여겨 본 뒤에
면조가 뷔페가 어떤지도 꼭 봐야겠다고 했다.
배도 고프니까 부주를 조금만 하고 식권을 받아서 가서 밥을 먹을까 했지만
식사 가격 뻔히 알면서 조금만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밥값 다 내기엔 그런 비싼 밥 먹을 생각 없었고,
모르는 부부에게 민폐인 것 같아서 그냥 식권 받으시는 분께 이야기해서 잠깐 들어갔다 나온다고 허락받았다.
천장이 낮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더 답답하고 전문 뷔페도 아닌지라 많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난 배가 매우 고팠으므로 먹고싶단 생각뿐...
면조도 그랬는지 자꾸 그냥 먹고갈까?? 물어봤다.
하지만 그냥 거짓말하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정직하게 보고만 나오겠다고 말하고 들어왔는데
앉아서 둘이 쳐묵쳐묵 한다는 건 좀 많이 찔려서
주머니에 빵과 버터와 쨈과 한입크기로 포장된 떡 두개를 쑤셔넣고 당당하게 나와서 뒷뜰 벤치에서 먹었다.
열라 맛있었다.
좀 더 가져올걸, 후회했다.
전문 예식장이 아닌지라 분위기는 좀 어수선한 감도 있고, 깨끗하고 럭셔리함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성당 안에서의 미사는 정말 너무 멋져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화려한 것도 없고, 조명도 따로 없이 어두워서 신랑신부가 주인공이라는 느낌은 꾸며진 곳보다 덜했지만
명동성당 성가대가 부르는 환희의 송가, 나즈막하게 공간을 울리는 파이프오르간 소리,
기도와 축복으로 느긋이 진행되는 혼배미사는 성스러우면서도 대단히 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와글바글 사람들이 가득차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명받고 입장, 퇴장하며 쫓기듯 진행되는 예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객들과 같이 숨쉬고, 기도하고, 축복받는 느낌. 좋더라.
이런 멋진 곳에서 가장 나를 나답게 있을 수 있게 해주는 멋진 사람과 결혼식을 할 수 있는 행운이라니!
하나님 감사해요.
촬영까지는 지켜보지 않고 배가고파서 나왔다.
뭐 먹을까 하다가 바로 근처에 있는 왕돈까스란 글자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돈까스 정식에 딸린 후추맛 스프가 나오고, 진짜 쟁반만한 돈까스가 나왔다.
맛도 있었다.
근데 엄청 많았다.
다먹고 나와서 역으로 향하는길에 ABC마트가 재오픈 기념으로 세일을 한대서 들어가서 구두 하나를 폭풍 결제. 하하하
5시에 미선언니를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어서 압구정으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사장님이 왠일로 뭐 틀어줄지 물어보셔서 둘 다 "앗! 나 듣고 싶은거 있었는데!!" 라고 소리치고
난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면조는 부르흐의 콜 니드라이를 신청.
아- 큰소리로 브람스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의 인간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어딘가 대인배의 기운이 감도는 멋진 교향곡이었다.
사장님도 옆에 앉아서 감상하시며, 브람스는 참 버릴 것이 없다고 하셨다.
브람스 4번의 끝판왕이라는 클라이버 버젼으로 들려주셨다.
콜 니드리아는 가슴이 아렸다.
면조가 총선 결과에 실망하고 비참한 기분에 이 노랠 열심히 들었다는데.
나랑 면조는 정치인도 아니고 관심도 결코 많은 편이 아니지만
총선날은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대의를 위해 나대신 힘든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에게 참 미안했던 하루였다.
첼로 연주곡은 항상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너무 좋았던 휴식시간을 뒤로하고 7시에 나와 도산공원으로 향했다.
한바퀴 삥 돌며 산책하고, 우스갯 소리하고-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이젠 7시가 지나도 날이 컴컴해지지 않는, 봄이다.
가는길에 꽃들도 피어있었지만 막상 도산공원엔 꽃이 없었다. ㅎㅎ
로데오 거리로 나왔다.
마음에 드는 남자옷을 파는 곳을 발견해서 면조가 폭풍 쇼핑을 했다.
이남자가 스스로 자기 옷을 사는 광경을 몇년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아주 마음에 드는 쿨하고 멋진 자켓과 니트를 한장 샀다.
ㅋ ㅑ 사람이 달라보인다.
옷을 사니 옷에 어울리는 신발이 사고 싶어졌다.
나도 다음주에 대전에 인사드릴 때 입을 정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장 한벌을 고르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있는 것들에 받쳐입을만한 귀여운 캐미솔을 하나 샀다.
기본아이템엔 역시 유니클로다.
면조는 구두를 둘러보고 몇 군데서 신어보기도 했지만 사지 않았다.
저녁을 뭘 먹을까 둘이서 한참 두리번대며 로데오 거리를 싸다니다가
눈에 들어온 chicken이란 글자를 보고 아무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치킨 먹을래?"라고 물었더니 면조가 심장뛰는 떨리는 목소리로 찬성했다.
그래서 오늘은 돈까스에 치맥에, 다이어트 망한날 ㅋㅋㅋ
하지만 엄청나게 걸어다녔으니 좀 봐달라. 나의 체지방들이여.
뭔가 두손에 쇼핑백들을 들고 있어서 그런지
집에오는 길이 엄청나게 뿌듯했다.
하루종일 같이 다녀서 면조와 이야기도 엄청 많이 했다.
결혼식 관련 자금계획도 다시한번 점검했다.
집이 해결되고 큼직한 건수들이 하나씩 해결되면서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기다려진다.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