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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집안일을 하는 휴가

오랜만에 그린 낙서. 오늘 산책할 때 목도리가 필요해서 벌써 그런 날씨가 되었구나 싶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 일기예보를 보니 이번 주가 화창한 가을날의 마지막일 것만 같다. 다음 주부터는 주중 대부분의 날이 흐리고 비가 온다. 윈터 이즈 커밍. 지난번 일기에도 썼지만 이 집으로 이사 오고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날씨 욕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월동준비를 슬슬 해나가야 한다.

 

집 정리가 아직도 되지 않았다. 가구들 배송도 여전히 다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상상한 그림대로 꾸며놓고 살려면 해가 두 번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심지어 내가 상상한 모습이 별게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지금은 텅 빈 거실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얻어온 poang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번 주는 휴가다. 계획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쉬고 싶어서 휴가를 신청했다. 화요일이 추석이었다. 추석을 맞아 정성이 깃든 한식이 먹고 싶어서 채개장을 끓였다. 조리과정은 복잡하다고 할 수 없지만 고사리를 불려서 삶고, 장을 봐와서 만들기까지 1박 2일이 필요한 요리다. 쉽게 먹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노동집약적이지도 않은 요리라서 좋아한다. 당연히 맛도 굉장히 깊다. 또 콩전과 주키니전을 부쳤는데 둘이서 밥이 지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맥주랑 먹다 보니 한 끼 만에 다 먹어 버렸다. 이렇게 올해 한가위를 보냈다. 보름달은 못 봤다.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정원 정리하고 하다 보니 며칠이 훅 가버렸다. 이케아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커튼을 사러 갔다가 이불이나 다른 것들도 잔뜩 사 왔다. 두 번째는 사이즈를 잘못 사온 이불보를 바꾸러 갔다. 교환만 하고 오면 좋으련만, 그렇게 이케아에서 많은걸 사고도 또 살 것이 있었는지 줄곳 살까 말까 망설이기만 하던 머핀 틀과 밀대를 충동적으로 집어왔다. 그리고 오늘은 전에 사두고 뭘 해먹을지 몰랐던 홋카이도 호박을 잘라서 호박 머핀을 만들었다. 맛있었다. 하지만 맛있는 요리를 해서 먹어도 때가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프고, 청소를 해도 집은 다시 더러워지고, 정원 정리는 그냥 끝이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 같고,... 그런 면에서는 보람이 크지 않은 휴가다. 그래도 회사일을 잠시 쉬는 것만으로도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겠지. 오늘은 좀 휴가처럼 보내고 싶어서 오전에 시간을 내서 한 시간이 넘는 요가를 했다. 오후엔 베이킹을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해 질 녘에 산책도 했다. 어두워지고 나서 텅 빈 거실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도 췄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번 기회에 좋다는 것을 발견했으니 업무를 하는 일상 속에도 잘 끼워 넣어 봐야지.

 

내일은 휴가의 마지막 날.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서 도시 나들이라도 다녀오고 싶었어서 내일 한 번 시행해 볼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소파가 배달되는 날이어서 조립을 해야 한다. ㅎㅎ 도시 나들이는 다음으로 미루자. 원래 휴가 중에 책도 좀 읽고 많이 쉬려고 했는데, 집안일을 내팽개치지 않으면 그럴 시간이 별로 안 난다. 특히 청소를 시작하면 모든 티끌을 다 닦아버리려는 나의 편집증 때문에 좀처럼 끝나지가 않는다. 좀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시간을 벌어야 하는 걸까? 이 큰 집과 워크-집안일-라이프 발란스를 잘 맞춰 살아가는 방법을 찬찬히 배워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