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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번뇌와 고성

지난주까지 들끓던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좀 잠잠해졌다. 이런 감정은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절대 잊지 않았는데 벌써 찾아오고 방심하면 또 찾아오고 그냥 같이 산다. 하지만 소강기는 반드시 있다. 그것도 신기하다. 동료들이 사람이 좋아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사이니까 이렇게 서로서로 관심 가져주고 살지, 그만두고 나면 안부 묻는 것조차 좀 이상한 사이가 곧 되어버리겠지.

나는 왜 어쩌자고 회사를 때려치고 싶은가. 회사를 다니며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기 싫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싶나, 왜 딱히 부족할 것 없는 지금의 삶에 나는 불만인가 생각하다가, 수긍이 가는 발견은 하나도 없이 점점 흐릿하게 멀어져 가는 의식을 배웅하게 된다. 요즘의 나는 총명함과는 좀 거리가 멀고 일할 때 외에는 상당히 멍청하다. 책을 이것저것 읽고, 팟캐스트를 이것저것 듣고, 드라마도 이것저것 보고, 유튜브에서 이것저것 재생해 보며 대부분의 쉬는 시간을 써버린다. 머릿속에 온갖 잡지식은 늘어가는데 내 것으로 와닿는 깨달음은 적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생기고 나서 더 이상 한 앨범을 마르고 닳도록 들으며 진정으로 뼈와 피와 살로 만드는 과정을 하지 않게 된 것과 같으려나. 넘쳐나는 콘텐츠 중에 아무거나 골라잡아 취하다 보니 뭐 하나를 다 감상하고 나서 속으로 곱씹고 곱씹지 않는다. 한평생 나를 괴롭히게 만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또 떠오른다. 지금은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아예 없는 것만 같다.

초심이라는 말이 있다. 초심을 잃지 말라고 할 때의 그 초심. 초심이란 말에 담긴 긍정적인 해석만을 가져오자면, 무언가를 시작할 때의 설렘과 넘쳐흐르는 정신 에너지, 마구 떠오르는 아이디어들, 매일매일 뭔가를 배워나가는 감각 등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거겠지. 하지만 시작과 끝은 맡닿아 있잖아, 끝이 없으면 시작도 없고 말이야. 그렇다면 초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짜로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 현재의 내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 하는 그것을, 내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이치에 맞고 올바른 선택이 아닌가?

 

번뇌는 끝이 없다.

 

주말 동안 로렐라이의 고성에서 1박 하는 호사를 누리고 왔다. 한국어로는 '성' 하나지만 성의 주인이 누구였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대표적으로 왕국을 다스리던 왕이 살던 곳은 슐로스(Schloss)라 부르고 주로 도시의 한복판에 있는 궁전이 있다. 한 동네정도를 다스리던 영주가 살던 곳은 부억(Burg)이라 부르고 주로 언덕 위에 있다. 내가 다녀온 곳은 부억을 호텔로 개조한 곳이다. 부억은 멀리서 우리 영지를 노리고 쳐들어오는 적을 발견해서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보통들 산 위에 있고, 벽이 굉장히 두툼하고, 파사드를 크고 아름답게 지어서 위용을 뽐내기보다는 콤팩트하면서 망루의 기능을 잘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성에는 망루탑이 반드시 있으니 올라가 보면 경치도 좋고 경비병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체험도 할 수 있다. 성마다 다르지만 동네의 입지나 영주의 사정에 따라 아름다움을 즐기는 부분도 마련되어 있다. 예쁜 정원이나 뒤뜰, 테라스가 있기도 하다. 왕좌의 게임이나 위쳐에서 본 성안에서의 삶을 독일버전으로 상상하며 구석구석 구경하면 재미있다. 중독되어했던 게임의 장면들도 곳곳에서 떠오른다. 딱히 관심을 가지거나 배운 적 없는 역사 속 이름 모를 영주 가문이 살던 곳이지만, 재미있는 콘텐츠의 배경으로 이용되는 곳들과 비슷한 덕분에 무지한 상태에서도 즐길 거리가 꽤 많다. 독일에 정말 많은 성들을 시에서 운영하는 관광지로 최소한의 관리만 하며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좀 더 적극적으로 숙박업소로도 이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니면 도서관이나. 나 같은 관광객에겐 특별한 경험이고, 이 지역 사람들에겐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체험+교육 공간이니까. 기껏 이렇게 튼튼하게 잘 지어놨는데 적극적으로 생활하고 사용하는 편이 좋지 않나 싶다. 럭셔리한 호텔로 꾸며진 부억에서의 숙박 체험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진짜 '럭셔리'가 존재해 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입지선정부터 건물의 모든 자재와 디자인이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을 고려해서 선택된 곳이다. 내가 방문한 주말은 날씨가 갑자기 춥고 비와 우박이 오는 날이었는데, 겨울밖에 없어 보이는 북쪽 스타크가문의 성이 생각나면서, 밖은 저렇게 혹독한 날씨여도 내부의 방을 쪼개서 난방을 한 성 안은 아늑했구나 알 수 있어서 더더욱 만족스러웠다. 방 안도 전부 앤틱 가구로 꾸며져 있었다. 벽지나 카펫, 타일 하나하나 훌륭했는데, 인상 깊었던 시설 중 하나는 시디플레이어였다. 고가구로 구성된 방안에 유일하게 튀는 시설물이 천장에 설치된 소니 스피커였는데, 냉장고가 숨겨진 장의 위칸에 시디플레이어가 숨겨져 있고, 그것과 연결된 스피커였다. 시디플레이어로 재생할 수 있게 세 장의 시디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바흐의 소품들 앨범과 멘델스존의 현악 몇 중주(까먹음) 앨범이었다. 틀어보니 좀 종교적이면서 성과 방의 분위기와 되게 잘 어울렸다. 체험에서 아주 중요한 배경 음악까지 제법 괜찮은 오디오 설비와 함께 선정해 두다니 과연 품격 있는 호텔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디를 시디피에 넣고 재생해서 듣는 경험, 세 장 밖에 가진 앨범이 없어서 그것만 돌려 듣는 경험이 되게 오랜만이라 좋았다. 듣고 싶은 음악을 감상한다거나 보고 싶은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거나 소유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 시대에 태어나서 어느 정도 돈 주고 살 능력도 이제 갖춘 내 팔자가 영주 팔자에 비해 못할 건 뭐야?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일기의 첫 부분에 콘텐츠의 풍요 때문에 생각이 없어진다고 투덜대던 것과는 영 딴판인 소리다. 역시 뭐든 해석하기 나름, 받아들이기 나름이구나. 굉장히 좋았어서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성에서도 자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로맨틱 가도는 정말 멋졌다. 멀지도 않은데 다른 계절에도 드라이브 다녀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