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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돌아오는 계절들을 반복해서 준비하는 삶

겨울의 맛이 나는 구운사과와 계피향이 좋은 찻잎을 사서 마시는 풍경

 

남이 쓴 여행기를 재밌게 읽지 못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여행기는 재미있다. 여행을 대하는 자세나 깜냥이 비슷해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왜 내가 감히 스스로를 초유명한 작가랑 같은 여행깜냥을 가졌냐고 하는지는 여행기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아저씨는 나 못지않게 게으른 편이다. 그래서 한 여행에 한 가지 이상의 테마를 잘 설정하지 않는 듯하다. 나도 예를 들어 피자를 먹으러 떠난 이탈리아 여행에선 어지간하면 피자만 먹는다든지, 뉴욕에서도 내내 피자만 먹고 다녔다든지, 맥주 마시러 떠난 여행에선 양조장만 죽어라 가고 밥은 대충 때운다든지 한다. 도무지 한 가지 이상의 목표 이상은 세우기도 달성하기도 어렵다. 피자랑 맥주를 그렇게까지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안 그래도 낯선 환경에서 오감으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뭔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그 기준을 심플하게 두고 싶은 것이다. 그날의 점심/저녁 메뉴 선정이 여행에선 늘 큰 테마인데 그걸 '이번 여행은 ㅇㅇ를 제대로 먹어보자'라고 정해두면 너무나 머릿속이 편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정신적 에너지로 다른 자극들을 느긋이 받아들이며 관찰하고 즐기는 것이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여행기인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란 하루키의 위스키테마 여행기 책을 지난 한국방문 때 종이책으로 사왔다. 가볍게 앉은자리에서 다 읽는 책 한 권을 사고 싶었고, 그게 하루키 책이면 사뒀을 경우 다음에도 또 읽겠구나 싶어서 산 것이다. 실제로 어젯밤에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전부 읽을 수 있을 만큼 짧고 가벼운 에세이였다. 여행에서 대단한 성취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여행기란 읽기에도 편안하고 좋다. 투자한 돈과 시간만큼 많은 것을 경험하고 누려야 한다는 자세를 기껏 며칠 없는 휴가를 써서 얻은 여행의 기회에서도 유지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위스키산지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을 테마로 진행한 여행이지만 한가한 시간에 펍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바 주인이랑 수다 떨고,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셔보고, 두어 군데 공장 견학을 하는 여행기를 따라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거기서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아일레이의 위스키 양조 사들은 바닷물 수위가 높아지는 여름철에는 양조를 하지 않고 본인 집이나 양조장 건물벽을 페인트칠하며 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바닷가에 있는 건물들도 다 깨끗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리고 다시 양조를 시작하는 9월이 되면 지긋지긋한 페인트칠 기간을 끝내고 기쁘게 양조장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내가 아일랜드를 여행하면서도 느낀 감상인데, 작은 섬에서의 생활은 사실상 계절을 견디고 대비하고 먹고 마실 것을 구하고 생산하고 저장하는 것을 대략 일 년 주기로 반복하는 삶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좀 다르다. 반복적인 일상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주기가 훨씬 짧다. 계절이 변화한들 사람이 하는 일은 매일이 똑같기 때문이다. 봄에 하는 일, 여름에 하는 일, 가을과 겨울에 하는 일이 다르다면 일 년이 좀 더 길게 느껴질까? 그래서 매년 반복되는 그 일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호기심이 들었다.

 

독일 농촌의 소도시인 이 곳에서 산지 7년이 넘었다. 나는 매일 비슷비슷한 회사일을 할 뿐인 회사원이지만, 재택근무를 하면서 하우스에 살고부터는 계절을 대비하는 행동들을 좀 더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정원관리를 해야 하니까 그렇기도 하고, 집이 커지니까 겨울철 대비를 잘해야 한다. 또 손님을 초대해서 숙박을 제공하고 이런 일도 잦아졌으니 적어도 두 계절치의 침구를 관리할 때 더 많은 양을 관리한다. 하루종일 비만 주룩주룩 오는 날씨가 7개월여간 지속될 예정이므로 추위와 적은 일조량 때문에 오는 우울감도 대비해야 한다. 유럽의 문화와는 관계없지만 블랙프라이데이 주간이었어서 쇼핑몰들이 무료배송이나 할인 이벤트를 한 덕분에 겨울에 마실 찻잎과 늘 갖고 싶던 일인용 다구를 주문했다. 일상에서 즐겨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사니 택배를 기다리면서 기대되고 행복하다. 찻잎은 벌써 도착해서 이미 마셔봤는데 하나는 너무 맛있고 하나는 기대에 못 미친다. 그래도 괜찮다. 따뜻한 차 한잔은 이 겨울철에 꼭 필요한 의식이자 부적과도 같다. 원래 독일의 겨울을 너무 싫어했는데 차츰 시큰둥했던 크리스마스도 더 기대하게 되고, 2월부터 시작하는 파싱까지의 실내생활을 풍요롭게 할 대책들이 속속들이 마련되고 있다. 이 땅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사람들이 문화 안에 녹여둔 지혜를 나도 습득하며 점점 겨울철이 덜 싫어지고 있다.